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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3월 11일, 그날

평생 가장 끔찍했던 하루

by 마이즈 Mar 13. 2025

2023년 3월 11일

<스즈메의 문단속>이라는 애니메이션을 감상하러 영화관에 갔다.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품을 그냥 거를 수는 없었다. 영화는 평이했다. 생각했던 퀄리티에 예상과는 조금 달랐던 시나리오. 매 작품마다 조금씩 더 나아지는 작화. 하지만 이야기의 절정에 달했을 때, 마음속에서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그 순간부터는 울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감상했다. 어차피 혼자 관람했기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이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왜 하필이면 3월 11일에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있는가?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기가 막혔다. 화면 속에는 대지진과 쓰나미에 휩쓸린 일본의 어느 항구 마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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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8일

집에서 동생과 스트리트 파이터 4 대전을 했다. 평소에는 실력이 비슷해서 아슬아슬하게 엎치락뒤치락했었는데, 어쩐 일인지 8번 연속으로 패배했다. 동생을 이기고 해주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내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일까? 어쩌면 이 대전이 우리의 마지막 게임일지도 모른다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동생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보냈다. 마음이 헛헛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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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9일

어린 시절부터 선망했던 대기업에 합격했다. 일본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동생에게 자랑스러운 형이 되고 싶어 노력한 결과였다. 막상 들어간 회사는 참 좋았다. 사람들의 실력도 배울 점이 많았고 나도 그들 중 하나라는 자부심이 커져만 갔다. 반면 시스템은 엄격했다. 일정 시간 이상 자리를 비우면 알람이 갔다. 인사 평가에도 감점이 있고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갑갑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마냥 특별하게만 느껴졌다. 이 회사에서 오래도록 버티며 나도 존경할만한 주변 동료들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 N사 판타지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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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24일

동생이 박사 시험에 합격했다. 감사함과 미안함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내가 지원해 준 것은 고작 첫 등록금과 일본에서 머물 집의 보증금 정도였다. 그 이후부터 동생은 장학금을 받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월세와 생활비를 충당했다. 의지 되는 형이 못 되는 것 같아 슬펐지만, 한 편으로는 스스로 자립해 가는 동생이 대견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2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동생은 해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전문 용어가 가득한 수업을 듣고 연구하며 생명공학 박사가 되었다. 자식 자랑하는 부모님들의 심정이 이해되는 것 같았다. ( 최고의 파트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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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7일

일본에서 동생과 재회했다. 살고 있는 모습을 둘러보았고, 함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아키하바라에 가보니 닌텐도에서 새로 나온 3DS라는 게임기를 홍보하고 있었다.


“저 게임기는 온라인 플레이가 된다더라.”

“게임기 출시되면 형이 하나 사줄게. 멀리 있더라도 같이 게임하자. 생일에는 한국에 올 거지?”


마침 한 달 뒤에 동생 생일이 있었기에 딱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동생은 그러자며 한 달 뒤에 한국에서 보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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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10일

동생의 생일이었다. 예정대로라면 한국에 들어오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변했다. 홋카이도에서 중요한 기회가 될 학회가 있다고 했다. 이미 교수님을 모시고 일본 최북단 쪽에 가있으며 내일 오후에 바다를 건널 거라고 했다. 벌써 가 있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선물이라도 사주고 싶다는 생각에 돈을 보내주겠노라고 했다. 생일 선물로 약속했던 게임기를 사라고. 학회에 다녀와서 함께 게임이라도 하자고. 하지만 동생은 반대했다. 형도 경제적으로 힘들지 않냐며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직접 사겠다는 말에 자존심이 상해서 조금 울컥했다. 그래도 대기업에 다니는 형인데 그렇게까지 무시할 필요는 없지 않나? 알았다고 생일 잘 보내라고 하고 대화를 끝냈다. 못 온다면 미리 말해줄 수는 있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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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11일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 돌아와서 일을 하던 중, 팀장님이 외쳤다.


“대박! 이것 좀 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도 자연스럽게 팀장님의 모니터를 바라봤다. 일본 북단의 한 해안가가 화면에 보이고 있었다. 엄청난 쓰나미가 밀어닥쳐 집을 뒤엎었다. 사람들이 떠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스튜디오가 시끌시끌해졌다. 왜 이렇게 시끄럽냐며 본부장님이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화면을 보며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저거 실시간이야? 일본 놈들 큰일 났네.”


그 말에 반응이라도 하듯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탰다. 벌을 받는 거라는 이야기도 했고 휩쓸려가는 모습을 멋지다는 말로 포장하기도 했다. 다른 누군가가 새로운 영상이 떴다고 하자 사람들이 와-하고 몰려가서 또다시 일면식도 없는 일본인들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아무리 한국이 일본과 뿌리 깊은 감정이 있다지만, 백번 양보해서 그것이 모두가 공감하는 문화라고 치더라도 이게 말이 되는 행동인가? 분노를 참지 못해 책상을 내려쳤다. 그리고 옥상으로 뛰어올라갔다. 뒤에서 본부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새끼, 저거 왜 저래? 미쳤어?”


옥상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고 동생에게 국제 전화를 걸었다.


분명히 일본 북단 해안가에서 머물고 오늘 홋카이도로 떠난다고 했었지. 이미 떠났을 거야. 벌써 홋카이도에 도착해 있을 거야. 분명해. 그런데 비행기로 간다고 했었던가? 혹시 배로 이동한 건 아니겠지? 곧 ‘여보세요’하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릴 거야. 제발 받아. 제발! 제발! 제발!


하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받지 않은 것도 아니고 애초에 연결 자체가 되지 않았다. 그 시점부터 나는 미쳐가기 시작했다. 대사관 번호를 찾아서 전화해 보고 일본의 지역 방송사에도 국제 전화를 걸었다. 당일에 개최 예정인 학회를 하나하나 검색해서 전화를 돌리기도 했다. 통화가 연결되지 않을 때마다 소리를 질렀다. 휴대폰에서는 자리 이탈에 대한 알람이 계속 울렸다. 인사 평가가 낮아지든 보안 팀에게 불려 가든 상관없었다. 힘들게 들어온 회사지만 오늘 당장 잘리더라도 괜찮았다. 단 하나. 동생이 무사하다는 사실만 알 수 있다면.


“괜찮아? 무슨 일이야?”


나를 걱정했는지 팀장님과 친구 조 군이 옥상으로 올라왔다. ( 맹우 )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시각에 전화를 한 번이라도 더 돌려야만 했다. 집이다. 집으로 가야 한다. 외부 인터넷에 제한이 있는 회사에서는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적다. 개인 메일을 확인할 수도 없다. 짐을 챙기러 사무실로 내려가보니 사람들의 반응은 더욱 격렬해져 있었다. 마치 여기가 무슨 보도국인 것처럼. 사람들의 표정에는 경악과 연민이 아닌 즐거움이 엿보였다. 끔찍했다. 당신들의 가족이 저기 있더라도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평소 존경하던 동료들이었음에도 순간적으로 혐오감이 느껴졌다. 짐을 챙겨서 회사를 빠져나왔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모두 모니터에서 보이는 영상에 빠져 있었으니까.


집에 달려가는 내내 생각했다. 어제 그렇게 연락을 끝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생일이었는데. 그까짓 자존심이 뭐라고. 아니, 아니지. 지금 한국에 와 있으면 아무 일 없었을 거잖아. 어떻게든 학회에 가지 못하게 말렸어야 했는데. 억지를 부려서라도 생일은 함께 보내야 하니 돌아오라고 혼냈어야 했는데. 애초에 일본 유학을 이야기했을 때 반대했어야 했는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결국 일본의 대지진과 쓰나미를 향해 동생을 보낸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집에 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확인했다. 동생의 메일이 와있었다. “3DS 샀어.” 생일 선물로 사주려고 했던 게임기였다. 내가 돈을 많이 쓰지 못하게 하려고 미리 샀구나 싶었다. 항상 형을 생각하는 착한 동생이었으니까. 문득 이 메일이 동생의 마지막 메시지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메일 발송 시간을 확인하고 쓰나미 발생 시간을 검색했다. 제발 쓰나미 발생 이후에 보낸 것이기를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발송 시각은 쓰나미 발생보다 3시간 전이었다. 메일은 동생의 안전을 알려주지 못했다.


스피커폰으로 끊임없이 국제 전화를 걸고 신호음이 울리는 사이에 일본의 관련 기관을 검색하거나 메일을 썼다. 회사에서 몇 번인가 연락이 왔지만 곧바로 끊어버렸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당장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예매하려 했지만 당일 표는 없는 상태였다. 막상 간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겠지만, 그럼에도 뭐라도 해야 했다. 탁자를 하나 더 끌어와서 노트북으로 일본 뉴스를 틀어두고 계속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밤을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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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12일

아침이 되자 동생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괜찮아]


세 글자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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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13일

잘릴 생각으로 출근했지만, 다들 아무 일 없는 듯이 대해주었다. 동생이 일본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몇몇 팀원들이 뒤에서 말해준 것 같았다. 인사팀이나 보안팀에서도 별다른 연락은 오지 않았다. 회사도 동료들은 나를 배려했다. 하지만 나의 눈에 비춘 동료들의 모습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업무적으로는 존경하고 싶은 부분들이 있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피하고 싶은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그들이 쓰나미 영상을 보며 웃던 모습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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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일

새로 얻은 사무실은 2011년에 일했던 대기업이 위치해 있던 주변이다. 이제는 판교로 이전해서 다른 회사가 입주해 있었지만, 지나가다가 회사 건물을 보니 문득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최근에 읽은 책 때문이었을까? 다행히 그 추억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감사했다. 누군가의 고통을 구경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게 되었으니까.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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