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허락된 어둠 속 옛 연인
20살부터 현재까지 쉬지 않고 연애를 이어왔다. 매번 이별을 겪으면 오래지 않아 새로운 사람이 다가왔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 중 하나가 연애 이야기라는 말도 있지만, 함부로 하면 안 되는 이야기라고도 생각한다. 상대에 대한 배려 혹은 책임감 때문이다. 일반적인 사건들과 달리 연애는 두 사람이 함께 경험한 이야기이고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의 생각일 뿐, 다른 사람이 쓰는 연애 이야기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나 역시 남의 이야기는 재미있게 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애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구 여친이 두 사람 있다. 하나는 코바야카와 린코. (내 게임 속의 지우개) 다른 한 사람은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PC통신 모임에서였다. 참여한 목적은 명확했다. 나름 PC통신 관련 사업을 하던 중이었기에 홍보를 위해 여기저기 동호회를 기웃거리던 시기였다. (ATDT01410-ATM0) 어느 20대 모임의 저녁 술자리. 내향적인 성격 탓에 홍보를 하러 나갔음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내게 그녀가 다가왔다. 첫마디는 ‘시 좋아해?’였다. 아니, 안 읽어. 잘 모르겠던데. 괜히 멋 부리기만 하는 느낌이야. 그래? 나 시인인데. 앗, 미안해.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시끌시끌했다. 술 게임을 하는 것 같아 자리를 슬쩍 피했다. 과하게 마시는 것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도 따라왔다. 자연스럽게 아웃사이더 둘 만의 대화가 이어졌다. 다음 순간 그녀가 말했다.
“나, 사실 불치병이 있어서 오래 못살아.”
헤에. 그렇구나. 그럼 죽기 전까지 재미있게 살아야겠네. 안 불쌍해? 왜 불쌍해? 내 말 안 믿지? 아니, 믿는데. 그런데 왜 반응이 그래? 무슨 반응을 해야 하는데? 중 2병 때문일까? 아니면 가까운 이들을 연이어 잃었기 때문일까? 나는 죽음에 무뎠다. 그런 내 모습이 좋았다고, 훗날 그녀가 말했다. 사연을 들으면 다들 안타까워하고 걱정하는 탓에 자기도 우울해지는데, 나는 그런 게 없었다고. 우리 따로 만나자. 내가 통신에서 쪽지 보낼게. 아이디 알려줘. 다음 날, PC 통신에 접속해 보니 쪽지가 도착해 있었다.
그녀는 루푸스라는 병을 앓고 있었다. 그 안에서도 다양한 형태가 있다고 들었는데, 태양 볕을 쬐면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그 탓에 비가 내리는 날과 밤에만 만날 수 있었다. 학교는 어떻게 다녀? 못 다녔지. 그래서 무식해. 중학교도 졸업 못했어. 검정고시는? 어차피 죽을 건데 뭐 하러. 아 맞다. 시인이라며? 응. 낮에는 커튼을 치고 방에서 시를 써. 죽기 전에 시집을 내고 싶어. 멋진 꿈이네. 근사하다. 근사해? 매일 갇혀 있는데? 흡혈귀 같잖아. 나도 어둠의 종족이라서 서로 알아본 건가. 그렇게 몇 번의 만남을 반복하던 중 심야 영화관에서 그녀가 고백했다. 당시 보던 영화는 미이라였다. 역시 어둠의 커플.
사귀고 나서부터 어쩌면 그녀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까 싶은 의심을 가졌다. 태양이 없는 곳에서만 만날 수 있다니. 나의 중2병을 자극하기 위한 연기가 아닐까? 어쩌면 희망 사항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의심이 사라지게 된 사건이 있었다. 하루 종일 비가 올 거라는 일기 예보를 믿고 낮에 만난 날이었다. 시내를 걷던 중 갑자기 비가 그치며 해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변하며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잘 걷지도 못하기에 들쳐 업고 일단 달렸다. 숨소리가 거칠어지는가 싶더니 급기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일단 태양을 피하기 위해 아무 건물이나 들어갔다. 그녀는 어느새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119를 불러 병원으로 가야 했다. 보호자냐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날은 먼발치에서 지켜보다가 돌아갔다. 잠시나마 병을 의심한 나를 탓했다.
이후, 비 오는 낮에 만날 때는 미리 나가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만약의 경우에 태양을 피할 수 있는 장소를 봐두기 위해서다. 내가 생각하는 최적의 장소는 비디오 방이었다. 시간이 긴 영화를 고르면 얼마든지 오래 있어도 좋고 창문조차 없는, 빛이 완전히 밀폐된 공간이었으니까.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고, 미리 알아둔 가장 가까운 비디오 방으로 데리고 갔다. 일단 방에 누워 있으라고 하고 액션 영화를 골랐다. 119나 응급차를 불러야 할지 물었지만,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잠시 후 그녀는 잠이 들었고 숨소리가 안정되어 갔다. 이대로 쉬게 놔두어야 할 것 같아 혼자 영화를 두 편이나 봤다. 처음 본 영화는 아놀드 슈왈츠 제네거가 나오는 액션 영화, 두 번째 영화는 전쟁 영화였다. 폭발음이 자꾸 나와 혹시 그녀가 깰까 싶어서 소리를 끄고 봐야 했다.
완전히 해가 지고 난 뒤, 비디오 방을 나와서 집에 바래다주었다. 집 앞에서 그녀가 말했다. 다음에는 비디오 방 말고 모텔로 가자. 침대도 있고 씻을 수도 있으니까. 화장실도 갈 수 있고. 하지만 모텔이라니. 좀 그렇지 않아? 뭐 어때. 우리 사귀는 사이잖아. 그리고 아까 갔던 비디오 방은 건물 화장실에 창문이 있어서 놀랐어. 아. 미처 배려하지 못한 부분이 있음에 또다시 반성했다. 내가 무언가를 놓치면 그녀의 생명이 위협받는다. 조금 더 철저할 수는 없을까? 고민 끝에 앞으로는 밤에만 만나자고 했다. 낮 시간은 위험한 것 같다고. 그렇게 언젠가부터 늦은 밤에만 데이트를 했다. 자주 차가 끊겼기에 그녀에게는 집에 간다고 거짓말하고 근처 공원에서 노숙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혼자 숙소를 잡을 정도의 경제적 여유는 없었으니까.
그녀와의 연애는 어느 날 갑자기 끝이 났다. PC 통신의 접속 기록도 더 이상 갱신되지 않았고 삐삐를 쳐도 답이 오지 않았다. 나에게 질렸거나 잠수 이별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언제나 그녀는 밝았고 의견이 다를 때면 오히려 신기하다며 좋아했기에 싸운 적도 없었으니까. 몇 주가 지나고 나서 그녀의 집 앞으로 갔다. 계속 기다렸지만 그녀의 방은 밤새 불이 켜지지 않았다. 내일은 켜지겠지. 오늘은 안 켜졌네. 내일은 진짜 켜질 거야. 한번 찾아가고 나니 습관처럼 가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그 빌라 앞에 앉아있는 밤이 일상이 되었다. 한 동안 그렇게 지내다가 결국 용기를 냈다. 그녀의 집으로 올라가 벨을 눌렀다. 아주머니 한 분이 문을 열었다.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요즘 연락이 안돼서요. 아주머니가 대답했다.
“이제 다시 못 볼 거야.”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돌아섰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왜 죄송하다고 했을까? 아까 그분이 어머니 이셨을까? 닮았나? 영화처럼 상복을 입고 있거나 눈물을 참고 있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던데. 하지만 매일 그녀가 들어가던 집에서 나온 분이니까. 아무래도 맞겠지. 그렇다면 왜 못 볼 거라고 했을까? 그녀는 역시 죽은 걸까? 조금 더 일찍 갔더라면 장례식이라도 참여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너무 늦은 걸까? 그녀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슬프지 않았다. 애도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죽을 거라는 사실에 동요하지 않는 부분이 좋아서 나를 만난다고 했으니까. 미이라를 보며 고백하던 날, 그녀가 말했다.
“내 소원은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연애를 해보는 거야. 이상형은 내가 죽어도 슬퍼하지 않을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거든. 아마 넌 아무렇지 않게 보내줄 것 같아. 그러니까 내 옆에 있어 줄래?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되니까.”
얼마간의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야 그녀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날 이후 그녀의 아이디는 PC 통신에 더 이상 접속하지 않았고 나에게 메시지가 오는 일도 없었다. 마지막 접속 시간은 항상 그대로였다. 죽은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을 간 것일지도 모르지. 그녀는 어둠의 흡혈귀였으니까. 죽음에 대해 직접적으로 보거나 듣지는 못했으니까. 치료를 위해 마계로 갔을지도 모르지. 나 혼자 인간계에 남기고 가버렸구나. 과거의 연인은 잊는 것이 현재 만나는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한다. 하지만 가끔은 예외가 있는 것 같다. 훗날 만나게 된 질투가 심한 연인조차 이 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기억에 남겨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사라졌기 때문인 걸까? 그녀를 동정하는 걸까?
십 수년이 지난 뒤, 오래된 짐을 정리하다가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나의 생일. 그녀는 나를 위한 시 한 편을 선물해 주었었다. 여전히 시의 감성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어둠의 연인치고는 너무 아름다운 시였다.
네 이토록 기쁘고 즐거운 사랑인 것은
이만치의 닿을 수 없는 거리 때문일지도 모른다
너의 깊은 영혼이 묻은 음성
네 이마에 반짝이는 지성
너의 등허리에 메달린 고독
너의 섬세함이 배인 몸동작
이만치의 거리와 공간이
얼마나 사랑을 자유롭게 하는지
얼마나 사랑을 맑게 하는지
얼마나 사랑을 크게 하는지
그대, 사랑이 고단한 날개 누이는 쉼터가 아니라 한다
그대, 사랑이 시린 영혼 부비며 따뜻함 파고듦이 아니라 한다
그대, 시린 영혼 그대로 날아오르라 한다
태양을 향해 더 높이 더 높이
날아오름 때문에
아름답다는 사실을
난 내 아픈 날개만 생각했었다
나는 당신에게서 나의 아름다움을 본다
당신은 나를 비추는 거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