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탱해 준 감사한 아버지들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잘 들어오지 않으셨고 집에는 빨간딱지들이 붙었다. 어떻게든 회사를 살리려고 고군분투하셨기 때문이었을까? 아버지를 보는 날은 점점 줄어들었고 어려움 없이 부유하게 자라온 어머니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너지셨다. 사업 실패와 빚. 두 분은 만날 때마다 싸웠다. 그럴 때면 동생을 데리고 놀이터로 나갔다. 나에게는 지켜야 할 존재가 있었으니까. 내 나이가 두 자리 수가 되는 시점부터 아버지는 부모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준 것은 둘째 외삼촌이셨다. 서교동 집을 잃고 올림픽 아파트로 이사 갈 때까지 1년 정도 함께 살게 되었는데,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 아버지 대신 어른으로서의 훈육을 담당해 주셨다. 도둑질을 하다가 들켰을 때에도 아버지가 아닌 둘째 외삼촌에게 알려지는 것만 걱정했을 정도였으니까. (당신의... 을 훔쳐갑니다) 한국에 처음으로 패미콤을 정식 수입하셨고 게임을 선물해주기도 하셨기에 나에게는 더 특별한 어른이기도 했다. 올림픽 아파트로 이사 간 이후에는 삼촌의 매장인 마리오 하우스에서 아르바이트라는 명목으로 용돈을 받기도 했다. (추억의 마리오 하우스) 유년기에 존경하고 따르던 어른이셨던 삼촌은 결국 유행성 출혈열로 돌아가셨다. 나이가 어려 수혈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내 피를 나누어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갑자기 생활이 어려워지며 안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어머니는 쓰러지셨고 내가 돈을 벌어야만 했다. 아버지와는 연락이 끊겼기에 더 이상 의지할 어른이 없었다. 그 와중에 나에게는 ‘가장’이라는 주박이 걸려 있었다. 돈이 된다면 어떤 일이든 닥치는 대로 했다. 구두 배달도 하고 전철 안에서 물건을 팔기도 했다. 그러던 중 처음으로 정기적인 일자리가 생겼다. 종로에 있던 애니메이션 클럽. 일본 문화 개방 이전이라 불법이었음에도 꿈같은 시간이었다. 그곳에서 알게 된 형들은 나에게 있어 닮고 싶은 어른이었다. 여전히 만화를 좋아했고 나를 어린아이로 대해 주었다. 때로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시야를 알려주기도 했다. 세상에는 놀랍게도 전쟁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어. 이 작품을 보면 이 캐릭터가 그렇거든. 악당이라도 무조건 무시하지 말고 그 사연을 알아봐야 해. 형들은 어쩌면 애니메이션을 통해 교훈을 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나를 위해서. 너무나 좋았던 그 시절은 경찰에게 단속되면서 어느 날 갑자기 끝이 났다. (오타쿠는 불법입니까?)
외 삼촌의 죽음과 애니메이션 클럽 형들의 단속으로 의지할 어른을 잃은 나에게 나타나준 것은 헌 책방의 할아버지였다. 훈육을 하거나 교훈을 주기보다 그저 조용히 쳐다보기만 하셨는데,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양팔이 모두 없으셨다. 그럼에도 매일 부지런히 헌책방 문을 열었고 가끔은 빗자루 질도 하셨다. 냄새나고 더러운 헌 책방이었음에도 할아버지의 모습은 고결하게 느껴졌다. 딱 한 번 같이 식사를 하기도 했다. 책장 뒤에 숨어있는 비밀의 방에서였다. 할아버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대꾸도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셨지만, 분명히 듣고 계신다고 생각했다. 한번씩 책을 가져다주기도 하셨다. 너의 지금 고민에는 이 책이 딱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 헌책방 또한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요구르트와 콩자반)
불량한 중학교 시절을 보내고 고등학생이 된 나를 바로 잡아준 분은 게임 매장, 으뜸의 사장님 이셨다. 나의 꿈인 게임이 엮여 있었기에 더욱 특별할 수밖에 없었는데, 돈을 벌면서도 학교를 다닐 수 있게 해 주셨다. 종종 나를 찾아서 가게에 불량한 아이들이 오면 불편한 표정을 짓기도 하셨는데 사장님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 그들과는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게 되었다. 대신 게임을 좋아하는 아이들과 친해졌다. 나의 꿈이 게임을 만드는 것임을 들은 이후부터 사장님은 적극적으로 게임을 권하셨다. 많이 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신 것일까? 사장님을 아버지라고 불러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쉬웠는지 친구들에게는 사장님이 나의 양아버지라고 말하고 다니기까지 했다. 민폐였을까? 사장님은 내가 대학생이 된 후 돌아가셨다. 이 분이 안 계셨다면, 어쩌면 나는 불량 서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으뜸)
대학생이 된 이후에도 어려운 일이 많았다. 가장 큰 고민은 동생의 등록금이었다. 대학을 그만두고 일을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이었고, 때마침 연인의 죽음까지 겹쳤다. (네 이토록) 아무 생각 없이 걷기 시작했는데 2주가 지나 제주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막내 외삼촌을 만났다. 둘이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나의 2주간의 모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아버지 없이 자란 나에게 친구처럼, 형처럼, 아버지처럼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 이후 막내 외삼촌은 나를 아들처럼 아끼고 걱정하며 종종 찾아와 주시기까지 했다. 아버지보다는 큰 형 같았지만, 특별한 가족이었다. 외삼촌 역시 병으로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나에게 유언을 남겼다. 혼자 남게 될 자신의 딸을 친 여동생처럼 돌봐 주라고 말씀이셨다. 그 유언은 잘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죄송하다.
그리고 이 모든 순간을 거리를 둔 채 지켜봐 주신 외 할아버지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유일한 외손자인 나를 아껴 주셨고 살 집이 없어지면 집을 내어 주셨다. 무모하게 마왕과 싸우려는 나를 데리고 함께 담판을 지으려고 해 주셨고, 언제나 인자한 모습으로 항상 걱정해 주셨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나의 친 아버지는 외 할아버지를 원망하고 싫어했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진짜 아버지보다 더 가까운 어른이셨다. 이 분을 존경했고 따랐기에 성을 바꾸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 제주소년 ‘우’는 내가 바라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어른이셨다. (어느 제주 소년의 일생)
20년 이상 친 아버지와 떨어져 지냈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렇게 많은 어른이 있었고 이 분들 모두 나에게는 아버지였다. 누군가의 성장을 위해 꼭 핏줄이 필요한 걸까? 유년기에 엇나가지 않게 훈육해 준 둘째 외삼촌, 아이의 시선에서 교훈을 전해주려고 노력한 애니메이션 클럽의 형들, 스스로 일어설 수 있게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준 헌 책방의 할아버지, 질풍노도의 시기에 엇나가지 않도록 방향을 잡아준 으뜸의 사장님, 포기하지 않도록 계속 지켜보고 응원해 준 막내 외삼촌, 그리고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나를 걱정하셨던 외 할아버지까지. 이렇게 많은 아버지가 있다니 특별한 삶이 아닌가. 친 아버지가 20년 이상 나를 방치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나에게는 이렇게나 많은 아버지가 있다. 나는 아버지 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