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같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면요.
실제로 하는 것보다 그것을 마음먹고 준비하는 데에 시간이 훨씬 더 많이 걸린다는 거예요. 제 선택이 옳은지 고민하고, 목표를 이루는 최선의 방법이 맞는지 고민하고, 사소한 문제점이라도 떠오르는 경우에는 대안을 찾아보고.
무슨 막중한 일이 있길래 그러냐고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매사에 그래요. 심지어 반나절짜리 휴가를 쓰더라도 그 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을 전날 하루 종일 고민해요. 좀 과한가요? 저는 제가 그렇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그저 매사에 좀 비장한 편이라고만 생각했었죠. 그런데 요새 MBTI를 보니 이런 모습으로 특정지어지는 성격 유형이 있더라고요. 그걸 보고 저도 제가 '그런 유형이구나' 생각하게 되었죠.
나쁘지 않아요. 이러면 그렇게까지 준비를 할 필요가 없었지만 아무튼 준비해 둔 덕에 매사가 순조롭게 흘러가거든요.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항상 최악은 내 상상이었다'라는 말처럼, 이미 마음속으로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여러 번 겪어 두었기에 실전은 그것보다 어렵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번에 좀 다른 생각이 들었어요. 남편이 이번 주말에 1박 2일로 여행을 가게 돼서, 저는 한참 전부터 아이와 둘이서 뭘 할지 고민했어요. 운전을 잘 못 하니 대중교통으로 재미있고 힘들지 않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을 계속 찾았죠. 그런데 모든 후보지가 다 장단점이 있는 거예요. 재미있어 보이면 멀어서 지칠 것 같고, 가까우면 그리 재미있어 보이지 않고, 위치가 적당하면 주변에 식당가가 없고. 며칠 동안 고민했는데 답이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결국 내린 답이 뭔지 아세요? 그냥 나가지 말고 집에 있자. 어이가 없죠? 만족할 만한 선택이 없을 것 같으니 아예 포기해 버린다는 게.
사실 별 것 아니잖아요. 그냥 다녀오면 되는 거죠. 어제 자려고 누웠는데 문득 스스로에게 화가 나더라고요. 뭘 그렇게 완벽한 나들이를 하겠다고 이러는 건지요. 이렇게 스트레스받으면서까지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는 건지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잠이 들었어요.
그리고 오늘 아침에 눈을 번쩍 뜬 순간! 결정을 내렸어요. 그냥 나가자! 아침을 먹으면서 아이에게 오늘 우리 기차 보러 가자고 그냥 말해 버렸어요. 계획 같은 건 아예 없었는데요.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좋다고 하더라고요. 아침을 다 먹고 준비를 마치고 아이와 저는 무작정 전철에 몸을 실었어요. 가서 기차만 보고 돌아오면 오고 가는 시간 대비해서 아까운 것 아닌가, 가서 재미없다고 하면 어쩌나 마음 한편이 묘하게 불편했지만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준비 안 된 시작이었는데 그냥 즐거웠어요. 전철을 처음 타 본 아이에게 표지판을 설명해 주는 것, 역마다 어느 쪽에서 문이 열릴지 맞추기 놀이를 하는 것. 게다가 서울역에 도착해서 기차를 보는 그 단순한 일을 아이가 정말 좋아하는 거예요. 딸기초코송이를 역 광장에 앉아서 먹으면서 행복하다고도 말했고요, 서울로 7017 위에서는 동상 흉내도 냈어요. 여기에 계속 있고 싶대요. 그 모습을 보면서 제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이 모든 것들이 계획했던 것들이라면, 아이의 행복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몰라요. 물론 그 모습을 보면 행복하겠지만, 예상했던 반응 정도로 생각했을 수도 있어요. 반대로 아이가 따라주지 않는다면 저는 은연중에 짜증을 냈을지도 모르죠. 계획을 변경하는 데에 스트레스를 받았을 수도 있고요. 그런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행복이라니, 계획에도 없던 행복이라니. 그래서 더 좋았어요.
물론 삶에서 노력과 준비는 아주 중요해요. 저는 계속 그런 사람일 거고요. 다만 이번 경험을 통해서, 과도하게 비장한 태도와 준비하는 자세로 그 본질을 잡아먹지 말자는 생각을 했어요. 즐거운 마음으로 해도 되는 일을 최선을 다하는 자세로 하면 더 이상 즐겁지 않은 거잖아요.
살다 보니, 너무 모든 것을 준비하지 않아도 삶은 어떻게든 흘러가더라고요. 준비한다고 해도 꼭 그 방향대로 흘러가는 것만은 아니었고요.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한강을 바라보며 생각했어요. 너무너무 최선이지는 말자고. 결정을 하면, 그냥 흘러가는 대로 맡겨 보자고.
그래서 다음에 아이랑 주말에 둘만 있게 되면 어디 갈 거냐면요.
그날 아침에 정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