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막 사부의 옛 제자(4)

불의 나비 57화

by 매화연

나직이 말을 내뱉자 그가 장난스런 목소리를 내보내었다.


“역시, 날 너무 좋아한다니까. 겨우 두 번, 그것도 엄청 짧은 시간이었는데 이렇게 똑똑히 기억해 준다는 건 거의 고백 아니냐?”


잊을 수 있을 리가. 절대 못 잊지.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할 거고.


나를 향하던 그의 시선이 연희에게로 서서히 옮겨졌다. 그러고는 눈으로 반달을 그려냈다. 나는 연희에게 다가가려는 그의 앞을 막았다. 그는 내 행동이 어쭙잖다는 듯 피식 웃으며 나를 한 번 일별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통과하여 앞으로 걸어갔다.


극심하게 차가운 큰 얼음이 부드럽게 흡수되는 느낌과 함께 체온이 일순 낮아졌다. 우두머리는 잠시 연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건 그저 임시로 만든 나의 분신일 뿐이야.”


그는 다시 몸을 돌려 나에게로 와 내 심장 쪽에 손을 넣었다. 심장을 중심으로 극도의 한기가 몸 전체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네가 지금 나에게 무슨 짓을 해도 모두 헛될 거라는 뜻이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조용히 노려보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의 태연히 휘어지는 눈매에 애써 억누르고 있는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이 모습도 너한테만 보이는 거야. 네가 그 보석을 잡지만 않았어도 우리의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을 터인데. 네가 여기 올 줄은 온다는 것까진 예측 안이었으나 너와의 만남이 계획에 있었던 건 아니었거든. 조금 곤란하게 됐지만, 뭐…….”


그는 잠시 곰곰이 고민하다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장소를 옮기지.”


그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순식간에 주변이 어두워졌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이곳에서 그의 눈동자만이 선명히 빛을 내고 있었다.


“박연희, 정신력이 상당히 강하더군. 그걸 버텨내다니 꽤 힘들었을 텐데 말이야.”


적막이 흐르는 공간에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희가 그런 행동을 보였던 건 역시 우두머리의 조종 때문이었군.


“제 아비의 목소리를 듣고 저항의 반응을 표한다라, 재미있군. 그렇지 않나?”


“특경부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지?”


그의 물음을 씹어 뱉으며 또 다른 질문으로 대답했다.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한 비아냥대는 말투. 더 나아가 다른 대원, 특경부 자체와 협회에 관해서도 자세히 아는 눈치였다.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웃음기가 없어진 얼굴로 그가 말했다. 위선으로 뒤덮인 웃음을 거두자 그 속에 가려졌던 살기가 온전히 드러났다.


“실군단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지?”


그에게 완전히 휘둘린 나는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내 행동을 가만히 보더니 우두머리는 다시 웃음을 지었다.


“본인도 답하지 못하는 걸 상대방에게 물으면 쓰나.”


“넌 도대체 정체가…….”


“정체가 뭐냐,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냐,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이어나가는 거냐, 이런 식상한 질문들로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어차피 대답 안 해줄 거 잘 알잖아?”


웃음과 가면 뒤에 숨겨져 있는 진실을 조금도 파악할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인지,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새하얘진 머릿속에서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왜 그렇게 성급하게 굴어. 수장끼리 진득하고 진솔한 대화 좀 나눠보자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잖아?”


아무렇지 않은 듯 뻔뻔한 저 미소를 지금 당장이라도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저건 그저 그의 분신에 지나지 않기에 나의 모든 것은 그에게 닿을 수 없었다.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비겁한 나의 무능함에 또다시 알 수 없는 어딘가의 한 곳이 갉아 먹혀갔다.


나는 주먹을 쥐어 화를 겨우 참고 또 참으며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역겹기 짝없으니까 그딴 말은 집어치워.”


“매정하긴…….”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든지 간에 이제라도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고 싶다면.”


한 걸음, 또 한 걸음. 천천히 우두머리가 나에게로 걸어왔다. 일정하게 유지되던 그와의 거리가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공연은 곧 시작되고 커튼콜이 내려오기 전에 제국은 도래할 거야.”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그는 유유히 모습을 감췄다.


우두머리가 사라지자 새하얀 빛이 어둠을 물리치고 다시 현실을 형상화하였다.


나는 손에 놓인 보석을 바라봤다. 보석에 감겨져 있던 실은 선명한 흠집만을 남긴 채 온전히 사라졌다.


그때, 누군가 집무실의 문을 몇 번 두들겼다.


“나야, 박 협회장. 들어갈게.”


엄마 목소리였다. 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천 팀장님을 보시자 엄마가 환히 웃으시며 반가움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유하야~ 진짜 여기 있었구나. 음, 근데…….”


조금씩 옮겨가시던 엄마의 시선이 나에게서 한 번, 연희에게서 한 번 멈칫하셨다.


“어째 타이밍이 좀 안 좋은 것 같네. 아닌가, 잘 온 건가?”


엄마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시고는 나를 스쳐 지나가셔서 팔찌를 빼시며 연희에게로 걸어갔다. 자세를 낮추시고 연희의 상처를 대략 확인하시던 엄마의 눈이 주황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나 찾으러 온 거야?”


더 이상의 질문 없이 묵묵히 치료를 이어나가시던 엄마가 천 팀장님의 물음에 입을 여셨다.


“응. 점심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하려고 보안 팀으로 가던 길에 이후를 만났거든. 너 만나러 간다니까 이후가 박 협회장 집무실에 있을 거라더라 하더라. 아, 이후한테 어디 가는 길이냐고 물으니까 뭐랬더라…… 그래, 허탈하게 웃으면서 태호한테 이실직고하러 간다더라고? 뭔가 복잡한 일이 있었나 봐?”


문 부순 걸 아버지한테 말하러 가는 건가…….


“어, 뭐…… 좀 많은 일이 있었지.”


“그러고 보니 쌍둥이 방학했나 보네? 지금 본부에 있는 거 보니까.”


“네, 오늘 방학식이라 하더라고요.”


엄마의 손을 타고 연희의 상처로 흘러 들어가던 해 속성으로 인해 상처가 순식간에 나았고 곧이어 연희가 눈을 떴다.


“김 원장님……? 엄마랑 아빠, 그리고 도헌 오빠도?”


“연희야……!”


연희가 일어난 걸 보시자마자 박 협회장님이 연희를 와락 안으셨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아빠가 진짜 얼마나 걱정했는데.”


박 협회장님의 품에서 나에게 상황을 묻는 눈빛을 보내는 연희를 보며 나는 말을 꺼냈다.


“네 팔찌 보석에 실군단의 실이 감겨져 있었어. 우두머리가 널 조종했던 모양이야.”


간결한 설명만으로는 완전한 이해가 어려웠는지 연희가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


“아빠, 나 괜찮으니까 좀 비켜 봐. 답답해.”


박 협회장님은 연희를 슬며시 나주며 말끔해진 오른쪽 손목을 조심히 어루만지셨다.


“괜찮아? 어디 아픈 곳은 없지?”


“응, 완전 멀쩡해.”


상처 하나 없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심에도 박 협회장님은 걱정을 거두시지 못했다.


“헌아, 이후가 널 간절히 찾더라. 어서 본부로 가봐.”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시며 나에게 말씀하셨다.


“아, 네. 그럼 이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나도 갈게.”


소파에서 일어나 연희가 내 옆으로 왔다.


“좀 더 쉬다 와. 무리하지 말고.”


“괜찮대도. 나보다 오빠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이거든.”


연희는 나를 살짝 노려보며 말했다.


“둘 다 조심히 가!”


“연희야 치료 방금 받았으니까 괜히 무리하지 말고, 응? 알았지?”


“알겠어.”


연희와 함께 세 분에게 인사를 하고 협회장 집무실에서 나와 본부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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