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그녀가 아픈 날, 그녀가 살 던 고시원에 간 적 있다. 두 평쯤 되는 작은 방에는, 맹렬하게 가습기 돌아가고 있었고 아픈 사람 특유의 시큼한 냄새도 방에 가득했다. 구석에 걸린 속옷 빨래에 눈길 주지 않으려 애썼다. 나는 간단한 말 몇 마디와 함께 약을 건네주고 좁은 복도 천천히 걸어 나왔다. 복도 양 옆으로 많은 문들 스쳐 지나며 이상한 패배감이 들었다.
짝사랑을 많이 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누군가를 참는 것과 같아 보이던 때였다. 모든 것이 다 처음이라 즐겁지도 힘든지도 몰랐다. 우리 처음 눈덩이처럼 뽀드득뽀드득 소리 내며 뭉쳐 다니다, 곧 천천히 녹아내렸다.
그녀는 인기가 많았다. 항상 목 위까지 단추를 잠근 남방을 입고 다녔다. 발목이 굵어 치마를 입지 않는다고 부끄럽게 말했고 하얀 얼굴 빨간 입술 아래 작고 진한 점 하나 있다. 나는 어리석게도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녀는 항상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고, 아쉽게도 그게 나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밤마다 걸려오는 그녀의 전화를 무뚝뚝하게 반겼다. 다 알지만 하나도 모르는 것처럼.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전화기 너머 그녀에게 고개 끄덕거렸다. 스무 살 그 시간 항상 기다렸다.
맥도날드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휴대폰을 보니, 그녀에게 부재중 전화가 8통 와있었다. 다시 전화를 해도 그녀는 받지 않았다. 이런 일 참 많았지만, 매번 가슴이 뛰었다. 그녀가 내게 하려 했던 말, 내가 듣지 못한 말이 뭘까 잠들지 못하고 생각했다.
“나랑 이제 사귀자.”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전화로 내게 말했다. 다행히 집에는 나만 있었고, 나는 내 방에서 소리 지르며 방방 뛰었다. '이제' 그녀와 사귄다. '사귀자'는 말도 좋았지만, '이제'란 말이 나는 왜 그렇게 좋았을까. '이제'란 말 안에 들어갈 '어제'와 '내일'들이 무척 반가웠다. 그녀와 당장 만나기로 했다. 그녀는 커피숍에 가면 항상 내게 아이스티를 시키라고 말한다. 나는 먼저 도착해 아이스티 두 잔을 주문하고 그녀를 기다렸다. 이제 곧 그녀를 만난다.
“걔도 좋아하고, 너도 좋아해. 너랑 걔 둘 다 만나고 싶어.”
그녀는 아이스티에 꼽힌 빨대를 물고는 내게 말했다. 발간 얼굴로 늦어 뛰어왔다고 덧붙여 말했다. 그녀가 입에 문 투명한 빨대 사이로, 복숭아 아이스티가 쪼르르 올라간다. 고개는 숙인 채 눈은 나를 본다. 그녀는 내 눈도 피하지 않고 그 말을 한다.
‘그래 알았어’
사실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녀는 눈이 너무 예쁘다. 단발이 잘 어울리고 항상 화가 난 것 같은 얼굴이다. 나는 예쁜 것에 항상 약하다. 그 얼굴이 좋아서 나는 ‘나중에 연락하자’ 그 말 남기고 커피숍을 나왔다. 어떤 기분 몇 가지가 마음 근처에서 한꺼번에 기웃거렸다.
‘그렇게 많이 좋아한 건 아닌가 봐’
내 사정 모두 아는 친구에게 그 말 했을 때, 순간 나는 왜 그렇게 부끄러웠을까. 친구 놈은 아직 아무 말 없이, 다 마신 콜라캔만 몇 번 더 홀짝였다. 나는 덜 마른 티셔츠를 입은 것처럼 어떤 마음이 풍기는 냄새 숨기려 애썼다. 부끄럽게 짝사랑 끝났고, 더 부끄럽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녀의 고시원 복도 나올 때처럼 그날 천천히 걸었다.
그녀를 소아과에서 만났다. 나는 내 아들을,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병원 대기실에서. 그녀도 나를 봤는지는 모르겠다. 시선 흘리며 그녀와 그녀의 아이 훔쳐봤다. 나이 들어도 너는 참 예쁘구나, 예쁜 아이 낳았구나. 우리는 이미 십몇 년쯤 지나있었다. '쯤'이라는 단어를 붙여야 할 정도로, 그 시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집에 와 아내에게 그녀를 만났다고 이야기했다.
'아직도 그렇게 예뻐?'
아내는 웃으며 내게 그렇게 물었고, 나는 당신이 더 예쁘다고 이야기해야 하지만,
'놀라서 자세히 못 봤네'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