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하게 지워지지도, 완벽하게 기억되지도 못하는
우리의 대화는 종종 지난 시간들로 새곤 했다. ‘이제 그만 좀 생각하고 싶은데”라는 말로 시작하여 어김없이 ‘진짜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아’라는 말로 마무리짓곤 했다. 잊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자꾸만 잊히지 않고, 우리 앞에 나타나곤 했다.
자려고 눈을 감으면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아 잠이 오지 않았고, 문득 행복한 순간마다 찾아와 머릿속을 헤집어 놓기 일쑤였다. 혼자 있을 때면 귀신같이 알아채곤 내 주변을 막아섰다. 그 이외엔 어떤 생각도 할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는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작아지기도 했다.
뒤를 돌아보면, 길게 늘어진 자국이 있었다. 아주 길고 게으른 꼬리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얕은 산 몇 개를 지나면, 깊게 파인 자국으로는 맑은 물이 들이차 있었다. 그 위로 노를 젓고 유유히 지나가는 얼굴들이 보였다. 또 그곳을 지나면 폭포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는데, 너무 깊숙한 산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어 차마 귀를 가져다 대지 않고선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곳을 지나면 끝이 있을까 싶은 사막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한 줌, 한 줌의 모래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재잘거리는 걸 듣다 보면 그곳에는 밤이 내렸다.
눈부신 밤이 되면 모래들은 잠이 들고, 그제야 오아시스의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아주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흘러가는 물결이 만들어내는 소리였다. 오아시스에서 목을 축이고 나면 모든 걸 집어삼킬 듯 커다란 모래 산 앞에 당도하였다. 숨이 막힐 듯한 모래바람이 불어왔고, 잊고 있던 기억이 쏟아졌다. 사막의 별빛보다 더 진하게, 더 빠르게 쏟아져 내렸다.
거기에서 늘 ‘이제 좀 그만 생각하고 싶은데’라고 말하곤 했다. 너무나 오랜 시간을 함께 하여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서로에게 너무나 깊이 박혀 들어갔기에,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서로가 박혀 들어갔던 자국이 채 아물지 않은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서로를 할퀴고, 밀어내고, 쥐어짜던 아픔이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었다. 모래바람에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래바람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 서로가 만들어낸 대화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서로가 만들어내었던 찬란하게 빛나던 순간들이 꽃을 피워 내었던 흔적도 보였다. 꽃잎은 이미 말라 바스락거리는 한 줌 가루가 되었지만, 여전히 꽃이었다. 색을 잃었고 향기도 잃었지만 여전히 꽃이었다. 어떤 질감의 꽃잎이었을까를 상상하고, 수줍게 미소 지었을 꽃받침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러면 어느덧 왜 우리가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했는지를 떠올리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리고 나면 ‘진짜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아’라는 말과 함께 다시 긴 자국에서 나왔다. 미끄러지듯 하지만 힘겹게, 온갖 과정을 되풀이하는 듯한 아픔으로 그곳에서 벗어 나왔다. 재생목록이 엉켜버린 영상처럼, 맞춰지지 않은 퍼즐처럼, 균형이 맞지 않은 그네를 타는 것처럼 순서와 균형을 잃은 일이었다. 까마득한 안개를 헤치고 나온 것처럼 숨을 헐떡거렸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아픈 역사로 남아있을까. 큰 용기를 갖지 않고는 돌아보기 힘든, 그런 지나온 길로 남아있을까. 함께 했던 지난 시간의 색을 모두 잃은 채로, 아무런 색도 아닌 채로 낡아 있을까.
우리는 서로에게 축 처진 꼬리 같은 역사가 되었다. 부정할 수 없고 더 이상 손 쓸 수도 없는 과거의 뒤안길에 폈다가 이미 진 꽃이 되어 있었다. 깨끗하게 지워지지도, 그렇다고 완벽하게 기억되지도 못하는 얼굴이 되어있었다. 거짓말 같은 열정이, 할 줄 몰랐던 계산이, 뉘우침의 때를 빗나간 잘못들이 역사를 존재하게 했다.
우리가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서로가 먼 길을 돌아 만들어낸 역사가 다시 먼 길이 되어 떠나고, 온갖 소리를 잃어 이제는 어색한 침묵만이 남겨졌다. 조금 더 오래된 역사가 되면 그때에는 눈을 제대로 맞춰볼 수 있을까? 모래바람에도 자신을 지킬 준비가 조금 더 된다면 그때는 역사가 된 서로를 안아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