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 같지만, 기분은 이상하게 자꾸만 변해갔다. 온갖 감정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약간의 기대를 가졌다가 시무룩해지고, 다시 설렘을 조금 느꼈다가 도로 풀이 죽곤 했다. 어둠 속을 더듬더듬 매만지며 걸었다. 까만색에도 감정이 있다는 것을 느끼며, 계속 반복되는 색이지만 서로 다른 질감을 가졌음을 배워나가고 있었다. 표정은 마음으로 새기고, 글자는 짐작으로 읽었으며, 숫자는 소리로 세었다. 그렇게 어둠에 익숙해져 갈 무렵,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빛이 뚝 떨어졌다.
어둠 속에 뚝 떨어진 빛은 작았지만 강렬했다. 아주 서서히 주위를 밝혀가고 있었다. 눈을 뜨고 그 빛과 마주하느니 차라리 눈을 감고 있는 게 편했다. 질끈 감은 눈 사이로도 자꾸만 빛이 새어 들어왔다. 조심스레 눈을 떴을 때 내가 알고 있던 어둠은 자리를 뜬 후였다. 어둠의 흔적을 잔뜩 뒤집어쓴 채 그렇게 새로 당도한 빛을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 어둠이 남겨준 마지막 차가움을 손에 꼭 쥔 채였다. 시간이 흐르자 빛의 온도가 공간에 잔뜩 풀어졌다.
사방이 따뜻해졌다. 긴장한 채 웅크렸던 표정이 조금씩 녹아내렸고, 손에 쥐고 있던 마지막 어둠의 차가움은 주변의 온기를 이기지 못하고 내 손에서 미끄러지듯 새어나갔다. 차가움이 바닥으로 뚝 뚝 떨어졌지만, 이내 냄새 하나 남기지 못하고 빛 속으로 사라졌다. 빛은 굳어있던 내 마음마저 풀어주었고, 내게 많은 것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천천히 하지만 전부 다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어둠 속에서 짐작만 하던 것들이 눈에 실재하는 사물이 되어 나타났다. 짐작만 하던 것들을 두 눈으로 보게 되었고, 상상만 하던 표정을 마주하여 눈빛을 교환할 수 있게 되었고, 소리로만 세던 숫자들을 정확히 셈할 수 있게 되었다.
꿈꾸던 그림 속에 들어간 것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들의 연속이었지만 이내,
만져보지도 못하던 구름의 맛을 본 것처럼 벅차오르는 날들의 연속이었다가 결국
만나보지 못한 운명의 끝을 미리 보여주듯 더 이상의 기대를 갖지 못하게 하던 어느 잔인한 날.
단지 언제 꺼질지 모를 뿐이었지만, 꺼지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모든 것이 환영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모든 것을 짐작으로 느끼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 지난 시간으로 다시 나를 밀어 넣는 잔인함에, 나는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흘린 눈물이 누군가에게 또 다른 상상이 되어 어느 밤 아래로 촉촉하게 흘러 내려갔다.
빛은 사라졌고,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다시 어두워진 주위에 적응하기 힘든 것은 내 눈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나 혼자만 그곳에 남게 되었다. 빛이 익숙했던 전부를 삼켜버리고, 그 자리에 어둠만이 내려와 조용히 내 곁을 지켜주었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을 뿐이지만, 더 이상 같은 어둠이 아니었다. 전만큼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 남지 않았고, 짐작하며 그 안에 적응해 낼 자신이 없었다.
빛과 함께 했던 시간은 아름답지도 않게, 슬프지도 않게 그저 사소하게 흩어져 사방에 뿌려졌다. 너무 잘게 뿌려져 차마 알아챌 수는 없지만, 사방에 빼곡히 자리하여 한시라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주변을 밝혀줄 만큼 밝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영영 사라지지도 않았다. 내 마음을 더 이상 동요하게 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점점이 남아있는 빛의 지난 작은 날들이 어둠에 완벽하게 묻힐 때까지, 그렇게
눈을 감았다 뜨면 다시 밝아져 있을 것만 같던 착각의 날들이 꽤나 오래 지속되다가 그래도
매일 밤 잠이 들면서 생각했다.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여전히 빛이 없는 어둠 속이라도, 내일은 작은 설렘을 품은 채로 다시 걸음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