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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의 여정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을까?

by 오션뷰


하얀 꽃 한 송이가 모래 사이에 떨어졌다. 길을 잃었을까, 일부로 그곳에 도달한 것일까, 늘 궁금했던 곳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모래 사이에 떨어진 하얀색의 꽃은 어떻게든 그곳에 뿌리를 내려보고자 했다. 가끔 그렇지 못한 날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날들은 햇빛이 쨍쨍했다. 간혹 비가 내렸을 뿐, 눈을 보기는 힘든 곳이었다. 흔들리는 모래 속에서 하얀 꽃은 함께 흔들려도 보았고, 온몸으로 햇빛을 받아들인 날이면 함께 붉어지기도 했다. 하얀 꽃잎은 알 수 없었다. 그 여정이 얼마만큼 자신에게 이로울지 해로울지, 그런 것을 계산하기에 꽃잎은 아직 작고 어렸다.


무수한 모래알에 지쳐 다시 집으로의 여정을 시작해야겠다고 느끼기 시작한 하얀 꽃 앞에, 그 수많은 모래알을 건너 선인장이 나타났다. 하얀 꽃은 무척이나 갈증을 느끼고 있었고, 그걸 알아챈 선인장은 자신의 일부를 부러뜨려 하얀 꽃의 목을 축이게 했다. 비로소 몇 주 동안 꾹 다물고 있던 하얀 꽃의 입이 열렸다. 모래를 닮아가던 꽃의 입 속에서 비로소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인장이 처음으로 들어보는 억양이었다. 선인장은 꽃이 어디서 왔는지를 궁금해했다. 선인장은 많은 곳을 여행했지만, 하얀 꽃이 피어난 그곳은 들어보지도 상상하지도 못한, 선인장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하얀 꽃은 선인장에게 자신이 떠나온 곳을 이야기해주었고, 알로에는 그 이야기 속으로 점점 빠져들어갔다. 이야기를 하다 지치면 선인장은 꽃을 위해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꽃의 목이 쉬면 기꺼이 자신을 여러 차례 부러뜨려 꽃이 마실 수 있게 해 주었다. 하얀 꽃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하루는 더 이상 성인장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고, 하얀 꽃은 알로에의 도움 없이는 더 이상 모래 안에서 숨을 쉴 수 없었다. 하얀 꽃과 선인장은 함께 해가 지는 모습을 보았고, 또 같이 해가 뜨는 모습을 보았다. 소량의 비라도 내리면 서로의 구석구석으로 비를 묻혀주느라 바빴고,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는 서로의 땀을 닦아주었다.


모래바람이 계속해서 심하게 불던 어느 날, 하얀 꽃은 자신이 피어난 곳으로 떠나야겠다고 선인장을 향해 말했다. 알로에는 너무나 큰 충격에 당당하던 촉촉함을, 생기 넘치던 초록을 잃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는 하얀 꽃은 함께 눈물을 흘렸지만, 그 눈물이 선인장을 다시 탄력 있게 하기에는 부족했다. 하얀 꽃은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하얀 꽃에게 눈과 귀와 마음을 열었던 선인장은 불안하기만 했다. 꽃이 떠나던 날, 선인장은 꽃에게 무언가를 남겨달라고 부탁했다. 하얀 꽃에게 정말 중요해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그만큼 중요한 무언가를 남겨달라고. 하얀 꽃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그 이유는 선인장, 이라는 대답을 남긴 채 먼 길을 떠났다.




영원 같은 기다림의 날들이 여러 번 지나갔다. 애틋한 마음이 커져갔고, 하얀 꽃이 그리워 눈물을 흘리기 일쑤였다. 선인장을 잊고 다시 여행을 시작하려고도 했지만 선인장의 마음속에는 하얀 꽃이 피어난 그곳만이 계속해서 그려졌다. 기다림을 이겨낼 수 없던 선인장은 하얀 꽃이 비로소 집이라 부르는 그곳을 향해 길을 나섰다. 심장이 두근대다가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하얀 꽃을 볼 생각에 흥분되다가 자신의 방문에 하얀 꽃이 어떻게 반응할지 두렵기도 했다. 함께 했던 지난날들이 이름 없이 모래알 사이를 메웠다.


다시 만난 선인장과 하얀 꽃은 서로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못 본 사이 하얀 꽃의 얼굴 사이로 전에 없던 생기가 돌았다. 며칠간 서로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함께 보고, 함께 만지고, 함께 느꼈다. 비로소 지난 기다림의 시간이 보상되는 것 같았고, 떨어져 있던 시간의 아픔이 치료되는 것 같았다. 그리웠던 서로가 충족이 되자 비로소 선인장은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하얀 꽃이 피어난 그곳엔 커다란 나무들이 많았고, 온갖 화려한 꽃들이 많이 있었다.


선인장이 지내던 곳에서는 선인장이 가장 크고 화려했는데, 하얀 꽃이 피어난 곳에선 선인장이 가장 키가 작고 멋도 없었다. 더 이상 하얀 꽃 앞에서 당당하게 보일 수도 없다고 생각하여 선인장은 자신감을 잃어갔다. 온갖 푸르름이 우거진 그곳은 비가 자주 내렸다. 하얀 꽃은 가장 커다란 나무 아래로 선인장을 데려가 함께 비를 피하곤 했지만 축축한 그곳에서 선인장은 위엄을 잃어갔다. 하얀 꽃은 시들시들해진 선인장을 꼭 안아 체온을 높여주려 해 보았지만, 이미 그곳은 많이 서늘해진 뒤였다.


선인장은 다시 모래알이 많고 햇빛이 쨍쨍한, 자신이 평생 누벼온 건조함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물렁해진 몸뚱이를 천천히 끌고 떠날 채비를 하였다. 하얀 꽃에게 같이 가지 않겠느냐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충분한 비에 더욱 수려해진 하얀 꽃의 얼굴을 보자 감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얀 꽃 또한 선인장과 함께 지낼 수 있을 곳을 끊임없이 생각했지만, 다시 집을 나설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다시 길을 떠나는 선인장에게 하얀 꽃이 물었다. 선인장을 기억할 수 있을 무언가를 남겨줄 수 있겠느냐고. 선인장은 늘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일부를 부러뜨려 하얀 꽃에게 넘겨주려 했다. 하지만, 더 이상 하얀 꽃에겐 선인장이 필요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상기시켜 줄 뿐이었다. 선인장은 눈물 가득 머금은 얼굴로 애써 미소 지으며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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