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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든 수많은 문장은 두터운 안개를 지나,

by 오션뷰


안개가 두터웠다. 안갯속을 뚫고 여러 차례 들어가 보기도 했고 안개를 끌어안아보기도 했다. 먹어 치워 보려는 시늉도 했다. 모든 우리의 행위에도 불구하고 안개는 흐려지기는커녕 더욱 두터워져만 갔다. 볼 수 있는 것이 서로 밖에 없었다. 모든 배경은 안개 뒤로 숨었고 모든 조명은 우릴 향해서만 비췄고 모든 소리는 우리의 입에서 나와 서로의 귀로만 흘러 들어갔다.


나의 발가락 근처까지 안개가 손을 뻗쳤다. 스윽-하고 아주 조용히, 하지만 꾸준하게 움직여 이내 곧 발등까지 안개에 덮일 것만 같았다. 여전히 발을 볼 수는 있지만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안개는 너의 등을 두드렸다. 너는 흠칫 놀랐지만 그 마음 숨기려 애를 썼다. 나는 힘껏 너의 등허리를 껴안았다. 우리 사이에 아무런 간격도 두지 않으려는 것처럼, 조금의 틈이라도 벌어지면 큰일이 날 것처럼, 이 순간을 위해 살아온 것처럼 그렇게 꽉 안았다.


우리의 모든 면적이 닿고 나니, 우리와 안개 사이의 거리가 조금은 더 벌어졌다. 안개가 더 가까이 오기 전 우리는 계속해서 그 틈을 벌리려 했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계속해서 불렀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 이름을 불렀다. 계속해서 불리어진 이름은 우리와 안개 사이에 둥실 떠다녔다. 몇 번의 획으로, 유연한 움직임 없이, 어렵지 않게 써진 글씨들이었다. 누가 누구의 이름을 부르는지도 모를 정도로 우리의 이름은 글씨로 또 소리로 또 단어로 그렇게 빼곡하게 차올랐다.


우리는 서로의 귀에 대고 마음을 읽어 내려갔다. 소리로 변한 나의 감정이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듯 너에게 닿았다. 네게 도착한 속삭임은 감히 맺힐 곳을 몰라 허둥지둥 댔다. 그러면 문자가 된 나의 속삭임의 끝에 대고 너는 문장을 마저 이어주었다. 마침표 대신 계속해서 우리는 쉼표를 찍었다. 하고 싶은 말은 계속해서 생겨났다.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솟아오른 우리의 속삭임은 자기 자신에 대한 고백이었고, 서로에 대한 맹세였다.


모든 감정이 휘몰아치자 우리는 온몸으로 서로를 껴안았다. 서로를 들으며 서로에게 대답했고, 서로에게 말하며 서로를 느꼈다. 세상에 그보다 중요한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우리는 곧 안갯속으로 사라질 것이었다. 모든 것이 세차게 뒤흔들리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나약함을 묻어둔 채, 그저 무너질 지금을 모른 척 뒤에 두는 것뿐이었다. 문장들은 서로의 귀로, 발을 딛고 있는 땅으로, 허공을 메운 우리의 이름들 사이 속으로 서서히 퍼져나갔다.




우리의 말들은 범위를 넓혀 갔다. 있고 싶은 자리를 찾아 뛰기도 하고 작은 날갯짓을 해보기도 했다. 어딘가에 심어지려는 듯, 혹은 어딘가에 뿌려지려는 듯. 말들은 안개 사이로 숨어 들어갔다. 사실은 우리 눈에 더 이상 보이지 않아 숨어 들어갔다고 생각했을 뿐, 말들은 멈추지 않고 뻗어나갔다.


빼곡한 우리의 이름을 헤치고 안갯속으로 맞서 들어갔다. 문장의 흔적을 찾아 계속해서 두리번거렸다. 우리의 입에서 나왔지만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목소리로 형태를 얻고 안개를 지나며 색을 얻었다. 우리의 감정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지만, 우리의 감정은 그저 하나의 단어에 지나지 않았다.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닌 문장들은 그렇게 빛의 각도와 거리에 따라 달리 보였다.


우리는 꼼짝없이 안갯속에 묶여 있었지만, 우리의 말들은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꼭 껴안고 수많은 말들을 내뱉을 뿐이었지만, 우리의 말들은 파도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밤이 새도록 지키지 못할 맹세만을 만들고 있었지만, 우리의 말들은 서로를 휘감는 바람이 되어 있었다.


서로의 이름을 끈질기게 외치던, 평생에 걸친 맹세를 하룻밤에 모조리 쏟아내던 우리의 밤은 수많은 문장을 남겼다. 우리는 진실했지만 순간을 이기지 못했고, 우리는 서로의 존재가 미치는 영향력을 믿었지만 변화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시간을 견디지 못했고 바람의 흐름에 승선했다. 파도가 여러 차례 우리를 덮쳤고, 우리는 조금씩 사라져 갔다. 안개에 삼켜지는 대신 우리는 파도 위에서 우리를 조금씩 잃어갔다. 서서히 사라지고, 또 사라져 우리는 서로 다른 바다로 향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무런 문장도 만들 수 없었다. 입술이 부딪힐 때마다 형태 없는 쇤소리만이 허공으로 퍼졌을 뿐이었다. 무게를 잃은 안개는 더 이상 주변을 장악하지 못하고, 우리 눈엔 많은 것이 들어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선명하지 않은 모든 것들부터 우리는 멀어져 갔다. 우리는 기억을 잃은 사람들처럼, 말하는 방법을 잃은 것처럼, 서로의 이름을 잃은 것처럼 조용히 서로에게 등을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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