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파도와 호수는 서로의 온도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파도는 가고 싶은 곳이 많았다. 가고 싶은 곳을 향하다가도, 금세 마음이 바뀌어 방향을 자주 바꾸곤 했다. 파도에겐 흥미로운 곳이 많았다. 파도에겐 어디든 갈 수 있는 곳이었고, 스스로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길 바랐다. 풍경의 일부가 되길 바랐고, 또 풍경의 전부를 꿈꿨다. 부지런히 움직였고, 많은 곳에 도착했다. 하지만 금방 지겨움을 느껴, 또다시 열심히 떠나곤 했다. 파도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음 가는 대로 계속해서 움직이기 위하여 마음도 몸도 가볍게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파도는 호수에 다다르게 되었다. 파도는 호수가 원래 가고 싶었던 곳이 아니었다. 파도는 길을 잃었고, 목적지로 향하는 방향감과 꾸준히 움직이고자 하던 원동력을 상실했다. 파도가 호수와 처음으로 수면이 닿던 순간, 그 찰나였다. 파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호수의 잔잔함에 놀랐고, 파도가 손을 뻗는 순간 호수가 움츠러들지 않아서 놀랐으며, 그럼에도 불평 없이 파도를 받아들이고 있음에 놀랐다. 파도는 온갖 속도를 잊었다. 멈추지 않고 움직이던 이유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파도는 호수 앞에서 비로소 멈췄다.
파도는 호수 주변을 계속해서 맴돌았다. 파도를 처음으로 멈추게 한 것은 호수의 온도였다. 멈춘 채 숨을 고른 파도의 눈에 비로소 주변이 보였다. 호수와 수면을 맞댄 파도는 이미 자신이 풍경의 일부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파도와 호수는 서로의 온도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파도는 얕게 출렁이는 호수의 몸짓을 따라 했고, 호수는 파도가 본성을 잃지 않도록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파도는 호수의 이곳저곳을 맛보았다. 호수는 파도가 여러 갈래로 움직일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파도는 호수에게 여러 번에 걸쳐 자신의 지난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파도가 만난 것들, 닿았던 것들, 여러 번 들렀지만 계속 생각나서 자꾸 찾아가던 곳들. 파도의 이야기를 여러 날에 걸쳐 듣던 호수는 함께 그곳을 여행하는 꿈을 꾸었다. 파도는 호수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이 점점 많아졌고, 함께 그것들을 보러 나서자고 했다. 호수는 여전히 잔잔했고, 묵직한 마음만 덩그러니 내비쳤다. 호수는 말없이 파도를 꼬옥 안아주었다.
멈춘 파도는 거센 성질을 잃어버려, 연약한 감정들을 내보이게 되었다. 파도는 그런 자신의 숨겨왔던 모습을 호수에게 보이는 것 같아 내심 속상했다. 계속해서 여기저기를 다니며 자신을 할 수 있는 한 커다랗게 드러내었던 지날 날들에 대하여 계속해서 이야기하였다. 파도는 호수에게 거센 물살을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다. 파도는 호수가 자신처럼 함께 느끼고 싶은 것이 많은지 궁금했다. 자신처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커지는 지도 궁금했다.
파도는 호수 앞에서 여러 차례 움직임을 선보였다. 오랜만에 기지개를 켠 파도는 잊고 있던 시원함에 자신이 억누르고 있던 갈증을 마주했다. 바람이 거센 날이면 파도의 욕구는 더욱 커져갔다. 바람에 맞춰 높이 솟아오르기를 여러 차례, 바람에 따라 호수의 끝에서 끝을 가로지르기를 여러 차례, 바람의 가운데에서 할 수 있는 멋진 모양새를 만들어 호수에게 보여주기를 여러 차례. 바람이 잦아들자, 파도의 움직임도 미미해졌다. 파도는 고개를 둘러 호수를 찾기 바빴다. 호수는 제자리에 있었을 뿐, 움직인 것은 파도였다. 파도가 비로소 다시 중심을 잡고 멈춰 섰을 때에, 호수는 이미 저만치 멀리에 있었다.
함께 많은 곳을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호수와 파도는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았다. 호수는, 그가 이미 품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 움직일 수 없었다. 호수는, 그가 가고 싶은 곳들을 다 셀 수 조차 없었다. 함께 할 수 있는 날들을 더 이상 셈하지 못하고, 그저 넋 놓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날들은 기억이 되어 호숫가에 머물렀다. 그들의 기억은 가득 차오르기도 했고, 가끔은 텅 비어 있기도 했다. 서로의 빈 공간을 채우고, 또 서로의 서랍 속으로 들어가던 날들이 이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파도는 멈출 줄 몰랐다. 호수에게 건네었던 온갖 마음이 아직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작은 온도를 느끼기에 파도의 속도는 너무나 빨랐다. 마음은 가벼웠고, 심장은 무거웠다. 호수는 이미 멀어진 파도를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쩌면 이미 예견되었던 것처럼, 파도의 얼굴보다 더 오래 보게 될 것이 그의 등이라는 걸 알았던 것처럼, 파도와 함께 했던 시간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그렇게 바라보았다. 파도를 꼬옥 안았던 기억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호수의 수면에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