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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의 사랑법

더 이상 기억되지 못한 채 산산조각 나는 파도가 아니었다.

by 오션뷰


작은 바닷가로 갈매기가 날아들었다. 간혹 길을 잃은 사람들이나, 호기심 넘치는 짐승들만이 불쑥 찾아오는 그런 곳이었다. 해변은 작았고, 바위가 많았으며, 구름 떼가 한나절 쉬어가며 재잘대는 그런 곳이었다. 무리를 잃었는지, 무리를 피해 왔는지 갈매기는 혼자였다. 뾰족한 바위 틈새에 터를 잡은 갈매기는, 하루에 꽤나 많은 시간 동안 바위 꼭대기에 앉아있곤 했다.


차가운 해변, 온기 없는 바위 사이로 작은 움직임을 포착한 파도는 처음엔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또 다음날 그 움직임을 보았을 때는 반가웠지만, 또 다음날이면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 우연이 계속되기를 바랐다. 파도는 갈매기가 나타날 시간을 기대하기 시작했고, 날이 밝기 시작하면 해변가를 어슬렁거렸다. 어느 틈새에서 갈매기가 모습을 드러낼지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문득 갈매기를 발견하면 가슴이 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 시간이 사라질까 초조한 마음이, 넋이 나간 채 모든 근육에 긴장을 푼 모양새가, 이미 흘러간 모든 지난 어둠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 바다 위에 넘실거렸다.


갈매기에게 이 작은 바닷가는 매일이 같고도 다른 곳이었다. 바다의 표정을 결정짓는 파도 때문이었다. 그리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아도 바다의 얼굴은 시시각각 달랐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잔잔하게 다가오다가도, 또 다음 날이면 잔뜩 흥분해있기도 했다. 거친 날을 예상했지만, 생각 외로 조용한 날들도 더러는 있었다. 아침을 평화롭게 함께 하여도, 오후의 얼굴도 그러리라 단정 지을 순 없었다.




햇빛도 강하고, 바람도 거센 어느 날이었다. 갈매기는 햇빛을 만끽하러 바위 위로 오르다가도 강한 바람에 다시 뒷걸음 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날들이 며칠간 이어지면서 갈매기는 자신만의 둥지에 묶여 있어야 했다. 파도는 너무 속상했다. 보고 싶은 얼굴을 볼 수 없는 마음이 이렇게나 비통한 것인지 전에는 알 수 없었다. 파도는 슬픔에 몸서리쳤다. 바다의 수면 위로 자꾸만 솟아올라 허공에 대고 세차게 움직였다. 허공에 대고 자꾸만 무엇을 쓰거나 그리듯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갈매기가 알아봐 주길 바라는 마음과 그의 귓가에 천둥과도 같은 파도소리가 울려 그를 괴롭힐까 걱정되는 마음이 뒤섞였다.


흐린 하늘 속으로 엉거주춤 해가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파도는 온갖 하고 싶은 말을 삼킨 채, 읽을 수 없는 무언가를 자꾸만 써대었다. 사라져 버린 해처럼 갈매기도 사라진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다면 다시는 아침이 찾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하루 내 만들어낸 스스로의 움직임과 아우성이 참으로 소용없는 것이었음을 받아들이는 밤이 너무나 아팠다. 바위가 만들어낸 골짜기로부터 갈매기의 기침 소리가 작게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불안한 밤이었다.



바다가 된 파도의 눈물 위로 조심스럽게 해가 인기척을 보였다. 고요한 바다였다. 며칠간 온 바다를 휘젓고, 모든 바위를 산산조각 낼 것 같던 바람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아침이었다. 아침이 밝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며 파도는 힘겹게 퉁퉁 부은 눈을 떴다. 갈매기 우는 소리가 바위틈으로 비죽 새어 나왔다. 갈매기 울음소리는 잔잔한 바다 위에 작은 배가 되어 파도를 향해 갔다. 넘실거리는 파도에 닿자, 작은 배는 조심스레 파도를 넘었다. 작은 배가 지나가자 파도의 시야에 갈매기가 들어왔다.




갈매기를 발견한 파도는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그에게로 힘껏 달려갔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괜찮았다. 스스로 만들어낸 힘으로 파도는 세차게 그를 향해 나아갔다. 바위에 여러 차례 부딪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유난히 어두웠던 지난밤으로부터 비로소 벗어나 파도는 갈매기를 와락 안았다. 작은 갈매기가 파도의 품에 들어오자 파도는 처음으로 채워지는 무언가를 느꼈다. 더 이상 금방 사라지는 파도가 아니었다. 만지고 나면 흔적도 남지 않는 파도가 아니었다. 기억되지 못한 채 산산조각 나는 파도가 아니었다.


갈매기는 몸단장할 시간도 없이, 밤새 젖은 날개를 채 말리지도 못한 채, 부리에 묻은 부스러기를 마저 닦지도 못하고 그렇게 파도에게 안겼다. 파도의 한가운데로 미끄러지듯 들어간 갈매기는 차가운 온도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파도의 열정이 잔뜩 전해졌다. 그렇게 갈매기는 그대로 파도의 안에 멈춰 섰다. 바다의 수면에 떠 있듯이, 파도를 타듯이, 두려움은 둥지에 두고 파도의 품에서 힘을 풀었다.


서로는 빈틈없이 맨 몸을 맞닿았다. 가져본 적 없이, 한평생 상상만 하던 따뜻함에 놀란 파도는 모든 속도를 잊었다. 별을 품듯 조심스레, 갈매기를 안은 파도는 행여나 그를 놓칠까 너무나 소중히 품었다. 갈매기는 그 안에서 전에 없던 포근함을 느꼈다. 조금이라도 바람이 느껴질 때마다 긴장하는 파도가 느껴졌다. 갈매기는 본인의 날개를 벗어, 파도를 향한 믿음을 보여주었다. 날개를 벗은 갈매기의 모습에 파도의 심장은 더욱 뜨거워졌다.


파도와 갈매기는 서로를 꼭 안았다. 그 무엇도 서로의 사이에 들어올 수 없다는 듯, 세상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한다는 듯 계속해서 서로를 안았다. 갈매기의 날개를 어깨에 툭 걸친 파도는 도약을 시도했다. 모든 힘을 동원했고, 눈에는 서로를 가득 담았다. 서로가 만들어낸 또 다른 열정은 바람보다도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차가웠고 또 뜨거웠다. 안으로부터 불어오는 열기를 타고 파도는 겅충 뛰었다. 바다 위로 한 뼘 올라섰다. 다시 또 한 번 도약, 구름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파도의 어깨에 걸쳐진 갈매기의 날개가 하늘에 대고 날갯짓을 시작했다. 서서히, 그리고 꾸준하게. 갈매기와 파도의 발아래로 둘의 작은 바닷가가 작은 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아무도 없는 바닷가, 바위와 구름만이 배경의 귀퉁이를 채운 바닷가는 잠잠했다. 바위들은 눈부신 햇살을 받아 더욱 빛이 났고, 바다는 꿈을 꾸듯 몽롱했다. 파도와 갈매기가 있던 자리만이 아직 따뜻한 채로 수면 위에 작은 파동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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