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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목욕

by 오션뷰


긴 여정의 끝에 다다르자 우리는 많이 지쳐있었다. 피부의 결을 따라 곱고 미세한 모래가 많이 묻어 있었다. 머리는 며칠째 감지 못하고 모자에 잔뜩 눌려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몇 번의 까만 밤과 몇 번의 파랗거나 흐린 하늘이 지나갔다. 뒤를 돌아보니 두꺼운 바람 속을 헤매느라 보낸 시간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여정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호수였다. 호수는 뜨거웠고, 둘이서 들어가면 꼭 알맞을 정도의 크기였다. 작기도 하고 크기도 했다. 모든 것이 차갑게 내려앉은 곳에서 오직 뜨거운 것이라곤 그 호수뿐이었다. 많은 거리를 움직여 온 우리는, 기꺼이 그 안에 들어가기로 했다. 호수는 밤의 기온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이 뜨거움을 간직한 채 우리를 맞이했다.


뜨거운 수증기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벗어던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완벽하게 덥혀진 호수가 그런 우리를 품에 안았다. 우리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주변을 둘러볼 새도 없이, 함께 호수로 뛰어들었다. 우리의 몸 말고는 모든 것이 거추장스러웠고, 서로가 만들어내는 언어 말고 다른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우리를 말리는 것도 없었고, 우리는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차가웠던 몸이 녹아내렸다. 서서히 긴장이 풀리고, 뻣뻣하게 굳어있던 마음도 부드러운 기질로 변해갔다. 호수 안팎으로 우리의 냄새가 퍼졌다. 긴 여정 동안 쌓여온 냄새였다. 길 위의 온갖 먼지를 뒤집어썼던 피부가 맑은 물을 조금은 흐리게 하기도 했고, 온몸으로 맞아온 바람이 호수에 닻을 내리기도 했다. 바람을 맞이한 호수가 자그맣게 파동을 일으킬 때마다 우리는 그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비로소 길의 끝에 다다라서야 모든 힘을 뺄 수 있었다. 기름진 머리카락이 수면 위로 유연하게 흐트러졌다.


호수에 온몸을 푹 담근 채 칠흑 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작은 별들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수줍은 듯 하지만 명확하게 불을 켠 채,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묽은 구름이 느리게 걷히자 미소를 띤 달도 얼굴을 내비쳤다. 달빛과 별빛이 서로를 뽐내며, 호수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별과 달이 만들어낸 윤슬을 따라 길 위의 기억들이 하나둘씩 그려졌다. 이미 축축하게 젖어 들어간 온몸이 지난 기억들을 읽어 내려갔다. 행여나 잊혔을까 싶은 기억이 촘촘하게 매달렸고, 흐릿했던 지난날이 수면에 맺혀 선명해졌다. 뜨거운 호수의 온도에 적응한 우리의 몸은 수면 위로 기억과 함께 떠올랐다. 조심스레 내뱉은 숨을 타고 따뜻한 수증기가 밤의 한가운데로 피어올랐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찾았다. 수면 위로 퉁기던 물방울의 움직임에 맞춰 우리는 호수 안에서 춤을 추듯 서로를 찾았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기억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우리는 간절히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어느덧 우리는 더욱 밝아진 윤슬 위에 떠있었다. 우리의 몸은 호수의 냄새로 갈아입고선, 기억들이 사라지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갔다. 호수의 그 무엇도 우리를 잡지 못하고, 우리 또한 그 어떠한 것에도 걸리지 않았다. 우리를 안은 채, 뜨거운 호수는 그렇게 썰물이 되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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