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들은 서로의 손과 손을 맞잡고 있었다.
작은 구멍에 빠져 허우적대던 날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 빠질 법도 한데 나만 빠진 것만 같아 억울했다. 서러운 마음에 구멍 밖으로 나서지 못하고 그렇게 멈춰 섰다. 넘실거리는 날들이 곱게 펼쳐져 있었지만, 모든 것을 뒤로한 채였다. 등을 지고 나니 마음은 무거웠지만, 앞에 보이는 것만 신경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음을 먹은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대로 주먹을 굳게 쥐고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하루하루 점점 더 주위가 어두워졌다. 짙어지는 농도의 어둠 속으로 조금씩 더 들어갈수록 나만의 굴이 생겼다. 아무도 찾지 못할 곳이었고 그 안에 자리를 잡자 정말 그 누구에게도 더 이상 보이는 존재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아주 조금 품었던 누군가 찾아주길 바라는 마음마저도 그 속에 갇혀버렸다. 세상을 등지고 대화로부터 멀어졌다. 표정을 등지고 교감으로부터 멀어졌다. 해를 등지고 체온으로부터 멀어졌다.
누군가에게도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졌을 무렵, 문득 사무치는 외로움에 바들바들 떨며 뒤를 돌아보았을 때 길게 빈 허공을 지나고 지난 후 마주친 눈빛. 그 강렬함, 따뜻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반가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아니 줄곧 머릿속으로만 하던 상상이 이루어진 것처럼, 거기 누군가 있었다는 사실에, 그 누군가도 역시 나를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요동쳤다.
한 번의 눈 맞춤으로 번개가 생겨났다. 어둠을 압도하는 번쩍거림에 넋을 놓는 것도 잠시였다. 그 순간은 너무나 짧았다. 그 기억을 계속해서 꺼내보며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할수록 그것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만 희미해지는 게 눈에 보였고, 자꾸만 기억의 모서리가 닳아가는 게 마음이 아팠다. 생각할수록 진해지다가도 모양새를 잃어가는 게 마음이 아팠다.
여러 밤이 지나도 순간은 멀어져도 강렬함은 짙어져만 갔다. 그래서 다시 눈빛이 마주치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굴 밖을 나서면 금방이라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기엔 이미 너무 깊게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아주 조금씩 돌아가려 안간힘을 써봤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흐른 시간만큼 정직하게 멀어져 있었다. 차곡차곡 쌓아 올렸던 외로움의 무게를 다시 짊어지고 왔던 길을 돌아가리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어두운 허공을 응시하고 있을 때 나의 굴 안으로 소리가 떨어졌다. 뚝- 뚝- 문장들의 마침표가 발 등에 닿는 소리 들었다.
내뱉어진 문장의 온도에 몸서리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끼던 순간이었으리라. 그것은 메마른 벽을 타고 꾸준히 흘러내렸다. 평범한 일상의 문장들이 쪼르르 벽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저 생각 없이 읽어 내리던 문장들이, 감정 없이 쉽게도 주고받던 문장들이, 온갖 표정을 담아 특별하게 포장된 채로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머뭇거리지 않고, 낯선 어둠에 당황스러웠지만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그렇게 다가왔다.
문장들은 서로의 손과 손을 맞잡고 있었다. 작은 낱말들 몇 개로 이루어진 문장들이 쉬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다. 저 멀리에서부터 줄줄이 내려왔다. 나에게로, 오직 나만을 위해서만 내려왔다. 마치 잡으라는 듯이, 그래야 한다는 듯이, 다른 곳으로 데려가 주겠다는 얼굴로 그렇게 내려왔다. 세상으로, 표정을 마주하러, 해를 온몸으로 느끼러 그렇게 나가자고 나에게 내려왔다. 아주 조심스럽게 문장으로 이루어진 동아줄을 건드려보았다. 저 멀리서부터 시작한 동아줄이 단단하게 묶여있음이 느껴져서 안심을 했다.
이내 마음을 먹고, 오른손으로 동아줄을 움켜쥐었다. 까슬까슬하지만 손바닥으로 줄 전체를 감싸고 잡으니 생각만큼 아프지 않았다. 지난날들이 계속해서 보였다. 줄 끝에 매달려 함께 나가자고, 그렇지 않으면 계속 함께 여기에 머물자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나머지 왼손으로 오른손을 덮었다. 두 손으로 줄을 꽉 움켜잡고, 어깨에 온 몸의 무게를 실었다. 문장들이 준비됐냐고 물었을 때 나는 구름을 떠올렸다. 사뿐히 나를 태우는 구름을, 그 위에서 하늘을 가득 품는 나를, 계속해서 우리를 부르는 곳으로 닿아가는 구름과 나를 떠올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식은땀을 온몸으로 쏟아내는 깊은 밤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바깥은 밝았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았다. 여전히 두 손으로부터 시작한 긴장은 어깨를 지나 온몸에서 멈추지 못한 채였다. 비로소 발이 내 무게를 완전히 견딜 수 있는 곳에 다다르자 두 손을 푸를 수 있었다. 문장으로 엮어진 동아줄의 끝이었다. 그곳엔 내 손 말고도 또 다른 손이 있었다. 보기만 해도 따뜻한 온도가 느껴지는 손이었다. 나는 처음 동아줄을 잡기 전보다 더 떨고 있었다. 온몸이 벌거벗겨진 기분이었고, 나조차도 보지 못한 구석구석을 모두에게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서두르지 않고 재촉하지 않고 손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장들은 여전히 주변을 따뜻하게 해주고 있었다. 내게는 닿을 수 없던 끝과 같던, 문장들이 흘러오던 곳. 그곳에 서서 뒤를 돌아보니, 그저 또 다른 시작일 뿐이었다. 어두운 구멍은 기억 속에 잠들었고,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