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도, 나 자신도 낯설게 느껴질 때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by maeokc

2월 마지막주 섬북동에서 함께 읽은 책은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


포르투칼어 원재는 『Livro do Desassossego』, 번역하면 '평온하지 않음의 책'이다. 영어권에서는 『The Book of Disquiet』로 소개된다. 한국어 제목으로 들어간 '불안'보다는 '고요하지 못함'을 담고 있는 책. 리스본 도라도레스 거리에서 회계 보조원으로 일하는 일상, 그 이면에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내면의 사유와 감정을 기록한 일기 형식의 산문집이다. 에세이 형식이지만 소설처럼 '가상의 인물'을 내세우고 있어 산문으로 분류한다고.


가상의 인물과 관련해서는 작가에 대한 정보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친구들과 '오르페우'라는 잡지를 출간하지만 2호 만에 중단하고, 친구와 출판사를 만들어 자신의 영어 시집을 두 권 출간하지만 생전에 크게 인정받지 못한다. 그의 사후 궤짝 속에서 2만 장이 넘는 원고가 발견되는데, 본명을 대신한 '가명'이 아니라, 고유한 인격과 문체를 가진 75개 이상의 '이명'으로 쓴 글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 후 47년이 지나, '베르나르두 소아레스'라는 이명이 쓴 원고만 따로 추려내 출간한 책이 『불안의 서』이다.


Q. 어떻게 읽으셨나요?

매옥 제목이 마음에 와닿았다. 이 두꺼운 책을 읽으면 '내 안의 불안'에 대해 알 수 있으려나 궁금했다. 책의 초반부는 그저 작가의 우울한 일기장이구나 생각했는데, 계속 읽다 보니 엄청 특이했다. 작가에 대해 검색해 보니 자신을 포함한 세상 모두를 낯설게 느끼는 '이인증'적 성향이 있었던 것 같고, 그로 인해 '이명'을 만들고,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게 된 것 같더라. 작가의 삐딱한 시각과 삶과 죽음 등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중간중간 시인답게 독창적이고 의미심장한 비유나 묘사를 한 부분들도 좋았다.

경영 최근 불행한 사람들은 책을 많이 읽기 때문에 삶이 괜히 복잡해지는 것 같다는 얘기를 자주 했었다. 문학과 철학이 있는 삶은 필연적으로 불행하다는 생각. 스토리의 흐름이 없는 책이라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독자를 자기 머릿속에 집어넣은 다음에 여기 한번 샅샅이 돌아다녀봐 하는 식. 작가가 글을 쓰기 전 무드 토닝을 하듯이, 이 책을 읽기 전 무드 토닝을 해야 집중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작가가 시인이라 티 나게 함축적이고 많은 어휘를 사용하는데, 그래서 한번 더 읽게 만들고, 원문도 궁금해졌다.

인지 '불안의 서'가 아니라 '아니다의 서' 같았다. 보고 있으나 보는 것이 아니다, 듣고 있으나 듣고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고 있지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불안하고 있지만 불안한 것이 아니다... 뭔가를 인지하지만 그걸 다시 부정하는 돌려 막기의 느낌. 그래서 독자인 나도 읽고 있으나 읽지 않고 있는 느낌. 그런데 그 와중에 어떤 문장에 꽂혀서 스크랩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만드는 묘한 책이었다.

선영 읽으면 우울해져서 읽기가 싫었다. 특히 초반부, 특히나 2월, 그 추운 계절에 우울함이 너무 찰떡이었다. 그러다 책을 반납하고, 다시 빌려서 뒤쪽부터 거꾸로 읽기 시작했는데, 그쪽은 상상에 대한 얘기들이 많이 나오더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꿈으로, 우리가 잠들어 있는 동안을 실제처럼 마주하는 등의 글이 재밌었다.

효진 몇 년 전 배우 한소희 때문에 알게 된 후 오랫동안 장바구니에 있던 책. 그런데 사고 보니 800페이지라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심리적으로 불안한 시기라 이런 책을 읽기에 적절한 때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발제가가 발췌한 480개는 하루에 한 개씩 읽어봐야겠다 생각했다. 유의미한 것을 찾고 의미 부여하는 게 중요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막막한 기분이 들고 저항감도 생기게 하는 문장들이었다.

주은 순서대로 읽지 않고 그냥 '행운의 쪽' 느낌으로 펼쳐지는 페이지를 읽었다. 그래도 많이 읽은 것 같다. 지금이 내게는 가장 불안한 때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내용이 전혀 와닿지 않는 걸 보아, '나는 불안하지 않구나' 하고 안심했다. 글 쓰는 것에 대한 얘기에는 공감되는 부분도 있었는데, 내가 추구하는 글 쓰는 방향과는 완전 반대라 다른 세계라는 느낌이 들었다.

주이 한 달 내내 이 책 한 권을 읽었다. 회사를 다니면서는 다 읽기 힘들었을 것 같다. 스토리도 기승전결도 없다 보니, 내 컨디션을 반영하는 책. 어떤 때는 '뭔 소리야' 하면서 짜증을 내면서 읽다가, 어떤 때는 너무 확 와닿아서 약간 벅차오르는 그런 감정까지도 느끼다가. '뭐야?'와 '너무 좋은데?'가 끝까지 반복되었다. 우리가 먼 곳에 여행을 가거나 대자연 앞에서 우주먼지처럼 느껴지듯이, 아웅다웅하며 살 거 없지 하는 그런 느낌으로 위안도 받았다.


Q. 마음에 남은 문장 3개

주이

p.43 삶이란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양말을 뜨는 것이다. 그럼에도 생각은 자유다.

p.316 지금 세상은 오직 바보들, 자아도취자들, 책동가들이 쥐고 있다. 삶의 권리, 승리의 권리를 얻기 위해서는 정신병원에 입원할 때와 어느 정도 동일한 조건이 필요하다. 사고 능력의 부재, 도덕심의 부재 그리고 과잉 흥분 상태.

p.372 내 안에 있는 우주가 타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경영

p.144 그나마 내가 가진 극히 부족한 감동의 능력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은 놀랍게도 대게 나와 정반대의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지 나와 유사한 정신세계의 소유자들은 절대 아니다.

p.185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존재가 된다는 의미다. 어제 느낀 것처럼 오늘도 똑같이 느낀다면 그것은 느낌이 불가능해졌다는 의미다.

p.197 우리가 실제로 차지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감각뿐이다. 우리가 본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감각하는 것을 토대로 하여 우리는 우리 삶의 현실을 그에 맞추어 구축해야 한다.

주은

p.424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읽는 소설 속 사건이나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이 태도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세월의 심술을, 현상의 변덕을 극복할 수가 있다.

p.71 나는 생각을 할 여력이 없다. 그만큼 졸리고 피곤하다. 나는 감정을 느낄 여력이 없다. 그 정도로 나는 잠이 부족하다.

p.98 "나는 나 자신 만큼이 아니라 내가 볼 수 있는 것만큼 크다."

효진

p.86 자신을 모른다는 것, 그것이 삶이다.

p.581 타인의 애정만큼 부담스러운 것도 없다. 그것은 타인의 증오보다 더욱 부담스럽다. 왜냐하면 증오는 애정만큼 의존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p.583 모든 욕구 가운데서도 저열함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것은 비밀을 털어놓으려는, 고백하려는 욕구다.

선영

p.732 파도도 없는 잔잔한 바다에서 나는 좌초했다. 심지어 서있어도 될 만큼 깊지도 않은 바다에서.

p.777 약간의 태양, 한 줄의 산들바람, 멀리서 시야의 경계를 만들어주는 몇 그루의 나무, 행복해지려는 욕망, 흘러가버리는 시간에 대한 고뇌...

p.788 내가 한 모든 일, 내가 느낀 모든 것, 내가 산 모든 삶은 어느 도시의 어느 거리를 매일 지나다니던 행인 하나가 줄어드는 사건으로 요약되고 말 것이다.

인지

60(34) 나는 내 안에서 다양한 개성을 만들었다. 나는 지속적으로 개성을 창조한다. 매번 꿈을 꾸기만 하면 나의 꿈은 꿈을 꾸기 시작하는 또 다른 사람으로 구체화되지만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하기 위해서 나는 스스로 파괴되었다.

p.361 나는 존재하는 줄도 모르고 존재하고 죽기를 원하지 않는데도 죽을 것이다. 나는 존재하는 나와 존재하지 않는 나 사이의 간격이며 내가 꿈꾸는 것과 인생이 나를 존재하도록 만드는 것 사이의 간격이며 나처럼 아무것도 아닌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념적이고 육체적인 중간 지점이다.

19(115)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내가 무엇이라도 되었다면 나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회계사 보조는 로마 황제가 되는 꿈을 꿀 수 있다. 영국의 왕은 그럴 수 없다. 영국의 왕은 이미 왕이기 때문에 그 외 다른 것을 꿈꿀 수 없기 때문이다.

매옥

p.163 나는 지극히 고독하다. 너무도 고독하여 내 몸과 내 옷 사이의 비어 있는 공간의 허전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p.442 자신을 정말로 알게 되면 그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리라. 무지의 결과이며 정신의 혈액인 허영이 없다면 우리 영혼은 빈혈로 죽어갈 것이다. 그 누구도 타인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다행이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거의 모르기 때문에 서로 어울려서 살 수 있다.... 우리가 살아낸 삶은 흐르는 오해다.

p.452 예술은 우리가 느끼는 것을 타인들에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다. 내가 뭔가를 깊이 느끼면 느낄수록, 그것을 전달하기란 더더욱 어려워진다.... 예술은 거짓말을 한다. 속인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거짓말은 우리가 나누는 입맞춤이다.


Q. 당신에게 '00의 서'가 있다면?

인지 욕망의 서, 인정받기를, 좀 더 사랑받기를, 그런 욕망으로 내 삶이 이끌어져 왔다.

선영 로망의 서, 좋았던, 행복했던, 그 반짝이는 순간들을 모으고 싶다. 아름다움을 빼면 뭐가 남겠나.

경영 농담의 서, 농담과 헛소리, 그런 걸 많이 하고 좋아한다.

주은 이상의 서, 현실에 발을 딛고 별을 보는 느낌. 인생을 다르게 보고자 한다.

효진 소유의 서, 항상 뭔가를 느끼고 싶고 계속해서 감동하고 싶고, 의미 부여를 하고 싶다.

주이 즉흥의 서, 그때그때 상태에 따라 사는 P의 즐거움을 추구한다.

매옥 분노의 서, 이건 정말 아니다 싶은 분노가 높아질 때, 글이 잘 써진다.


Q. 당신에게 삶과 죽음이란?

주은 삶이라는 찰나와 죽음이라는 영원

경영 삶은 우연 죽음은 필연

주이 삶이란 타인의 자유다

인지 죽음은 돌아가는 것이다

효진 삶은 '오직 오늘뿐', 죽음은 '부재중'

선영 삶과 죽음은 질량보존의 법칙


2026. 2. 28(토) 오전 11시 @ 책방 고즈넉

참석자: 7명 (인지, 경영, 선영, 효진, 주이, 주은, 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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