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사례로 돌아본 한국 모빌리티 주권 확보 전략
최근 글로벌 자율주행 산업은 기술 개발을 넘어 실제 도시 환경에서의 안전한 상용화와 운영 역량(Operational Capability) 구축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의 자율주행 생태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며, 유럽의 경험은 한국에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글로벌 협력 모델: 현실적 상용화를 위한 접근
글로벌 완성차 그룹인 Stellantis와 중국의 자율주행 전문기업 Pony.ai가 유럽 시장을 대상으로 레벨 4 자율주행 밴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사례는 한국 시장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Stellantis는 Peugeot e-Traveller 기반의 중형 밴 플랫폼을 제공하고, Pony.ai는 레벨 4 수준의 소프트웨어 스택 및 알고리즘을 통합합니다. 초기 실증 지역은 룩셈부르크이며, 이후 파리, 브뤼셀, 함부르크 등 주요 유럽 도시로 확대될 예정입니다.
이 협력의 핵심은 유럽의 까다로운 규제 환경 속에서 기술을 검증하고, 규제 준수와 데이터 검증, 안전 입증 체계 구축에 초점을 맞춘 시범 사업이라는 점입니다. 특히, 기능 안전(ISO 26262), 사이버 보안(UNECE R155), GSR II 및 UN R157 등 유럽의 엄격한 규제가 복합적으로 적용되고 있어, 단순한 기술 개발을 넘어선 규제 친화적 접근이 요구됩니다.
상용차(LCV) 중심의 합리적 전략
Stellantis가 경상용차(LCV)를 첫 대상 차량으로 선택한 점은 주목할 만한 현실적 접근입니다. 상용차는 고정된 운행 경로와 예측 가능한 주행 패턴을 가지고 있어, 안전성과 비용 효율성 측면에서 자율주행 기술을 초기 검증하기에 가장 적합합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향후 물류, 셔틀, 라스트마일 배송 등 B2B 영역 중심의 자율주행 상용화 전략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국 역시 복잡한 도심 물류 환경을 고려할 때, 상용차 기반의 실증 경험 축적이 매우 중요합니다.
유럽의 경고: 자율주행은 소프트웨어 전쟁이다
에스토니아 승차공유 플랫폼 Bolt의 CEO 마르쿠스 빌리그(Markus Villig)는 유럽이 전기차(EV) 전환에는 막대한 투자를 했지만, 자율주행(AV) 소프트웨어에는 같은 수준의 투자가 이뤄지지 않아 미국과 중국에 뒤처질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 경고는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자율주행 시대의 핵심은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 정의 차량(SDV)'이며, 차량의 안전과 서비스 가치가 코드로 결정됩니다. 미국 Waymo나 중국 Pony.ai처럼 이미 상용 서비스 단계에 진입한 글로벌 리더들이 내년 런던과 같은 주요 도시에 진출하는 것처럼, 한국 역시 외국 기술에 도시 교통 데이터와 이용자 패턴이 종속되는 구조를 경계해야 합니다. 한국 완성차 및 IT 기업들이 ADAS 수준을 넘어서는 풀스택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개발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미래 모빌리티 주도권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전략적 과제: 규제자에서 설계자로
유럽의 Bolt CEO는 EU가 단순한 규제자(Regulator)가 아니라, 산업 질서의 설계자(Architect)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도시별 로보택시 운영권을 지역 기업에 우선 허가해 주거나 인프라 보조금을 지급하여 '유럽형 자율주행 생태계 구축'을 지원해야 한다는 제안은 한국 정부와 지자체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한국 역시 엄격한 규제와 동시에, Waymo나 Baidu처럼 실도로 주행을 통한 대규모 데이터 학습 및 검증이 가능한 '한국형 규제 샌드박스' 환경을 제공해야 합니다. 자율주행은 단기간에 완성되는 기술이 아니며, 지금의 전략적 투자가 10년 후의 모빌리티 주권을 결정합니다.
Stellantis와 Pony.ai의 협력, 그리고 유럽의 전략적 경고를 바탕으로 한국 자율주행 산업이 공감해야 할 핵심 연결 포인트 5가지를 제시합니다.
1. "EV 이후의 경쟁은 이미 시작됐다. (한국형 SDV 전환 가속)"
한국 완성차 기업들의 전기차(EV) 전환 성공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미래 모빌리티 경쟁은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즉 SDV(Software-Defined Vehicle) 체제 전환 속도에 의해 판가름 날 것입니다. 이 전환 속도가 곧 한국의 국가 경쟁력입니다.
2. "도시 데이터는 미래의 석유다. (데이터 주권 확보)"
한국 도심에서의 로보택시, 자율주행 셔틀 운행을 통해 얻는 방대한 주행 데이터는 단순히 기업의 기술 발전을 넘어, 미래의 교통 정책과 안전 정책을 설계하는 핵심 자원입니다. 이 '도시 데이터'를 외국 기업에 종속시키지 않고 국내에서 축적하는 것이 디지털 주권의 문제입니다.
3.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운영 역량(Operational Capability)이다."
자율주행 알고리즘의 우수성만큼이나, 해당 기술을 복잡한 한국의 교통 환경(좁은 골목, 비표준 표지판, 다양한 이륜차)에서 어떤 방식으로 검증하고 안전하게 운영할 것인지에 대한 실증 경험과 운영 체계 구축이 성패를 가릅니다.
4. "한국형 규제 샌드박스 혁신이 필요하다."
유럽처럼 엄격한 규제가 있는 만큼, 기술이 성숙하고 자랄 수 있도록 Waymo나 Pony.ai처럼 대규모 실도로 주행을 통한 데이터 학습이 가능한 선제적이고 과감한 규제 샌드박스환경이 반드시 마련되어야 합니다. 기술적 완성도만큼 검증 프로세스의 설계가 중요합니다.
5. "지금의 무관심은 10년 후 종속으로 이어진다. (산업 주권 확보)"
자율주행은 단순한 '자동차 기술'을 넘어 미래 산업 주권과 디지털 주권의 문제입니다. 지금 전략적 투자를 하지 않으면, 2035년 한국 도로 위에는 한국 기술이 아닌 외국 기술 기반의 자율주행 차량만 남게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공유해야 합니다.
Stellantis–Pony.ai 협력은 기술 중심에서 규제와 현장을 기반으로 한 자율주행 운영 생태계 구축으로의 전환을 보여줍니다. 한국 역시 자율주행 산업이 기술의 문제를 넘어 전략의 문제로 전환되고 있음을 명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한국이 미래 모빌리티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현장형 혁신'과 '전략적 투자', 그리고 '소프트웨어 중심의 안전·교통정책 패러다임' 재정비라는 세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할 '골든타임'에 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