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법안, 그러나 멈춰버린 바퀴?

유럽 자율주행의 역설

by 조성우

자율주행의 최전선을 떠올릴 때, 우리는 보통 미국의 Waymo나 중국의 로보택시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유럽은 이 경쟁에서 뒤처져 있는 걸까요?


최근 PAVE Europe 컨퍼런스에서 나온 업계의 진단은 조금 달랐습니다. 유럽이 기술력에서 뒤진 것이 아니라, ‘파편화된 규제와 확장 불가능한 구조’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유럽의 현실: "테스트는 끝났다, 하지만 갈 곳이 없다"

현장의 목소리는 단호합니다. 유럽의 주요 기술 기업들은 "기술 검증(Testing) 단계는 이미 종료되었다"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그다음 단계인 '상용화'로 넘어가는 길목이 막혀 있다는 점입니다.

* 도시마다 제각각인 규정: 레벨 4 차량을 운영하려면 도시별 조달 기준과 안전 요건을 매번 새로 충족해야 합니다. 함부르크에서 승인받은 셔틀을 베를린으로 가져가면, 협상은 원점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 스마트 인프라는 본질이 아니다: Pony.ai와 MOIA 등 전문가들은 "5G나 스마트 신호등 같은 하드웨어 인프라가 필수 조건은 아니다"라고 지적합니다. 차량은 이미 센서를 통해 환경을 인지하고 있으며, 정말 필요한 것은 '잘 관리된 도로 데이터''책임 주체의 명확화'입니다.

이러한 정체 상황 속에서, 가장 먼저 제도적 돌파구를 마련한 곳이 바로 독일과 스위스입니다.



독일: 2021년 세계 최초 '레벨 4 정기운행' 법제화

독일은 2021년 자율주행법(Autonomous Driving Act)을 제정하며, 세계 최초로 레벨 4 차량의 '정기 운행(Regular Operation)'을 법적으로 허용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는 시범 운행을 넘어, 레벨 4의 지정 운영영역(ODD) 내 상업적 무인 운행을 가능케 한 획기적인 조치입니다.


독일 연방자동차청(KBA)이 제시하는 핵심 3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 기술 승인 (Technical Approval): 차량 및 자율주행 시스템 자체의 안전성을 검증합니다.

* 운행 승인 (Operational Permit): 구체적인 도시, 노선, 구간 등 특정 ODD에서의 운행을 별도로 허가받습니다.

* 기술 감독관 (Technische Aufsicht): (핵심) 차량 내부의 운전자는 사라지지만, 원격에서 차량을 모니터링하고 비상시 개입하는 '인간 감독관'을 법적으로 의무화했습니다. 시행령(AFGBV §14)은 기술감독관에게 원격 비활성화, MRM 해제 승인, 상황별 대체 주행승인 등의 권한을 부여합니다. 기술감독관은 ‘원격 운전수’가 아니라, 시스템의 예외·비상상황을 판단·관리하는 법적 책임 주체로 설계되었습니다.


AFGBV §14에 따르면 기술 감독관은 다음 요건을 갖춰야 합니다. 

• 기계공학, 차량공학, 전기공학, 항공/우주공학 등의 관련 학위(공인 엔지니어 또는 공인 테크니션 등) 보유.

• 해당 자율주행 차량 제조사로부터 정규 교육 이수.

• 해당 차량에 맞는 유효한 운전면허와 결격 사유 없음.

• 필요시, 감독관은 자신의 판단을 보조할 수 있는 추가 인력(지원인력)을 둘 수 있으며, 이들 역시 정기 교육 및 실습시험을 거쳐야 함.

Autonome-Fahrzeuge-Genehmigungs-und-Betriebs-Verordnung (AFGBV)


독일은 기술을 100% 신뢰하기보다, '책임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기술 감독관 제도는 완전 자율주행으로 가는 과도기에서 안전과 책임을 담보하는 가장 현실적인 해법으로 평가받습니다.



스위스: 2025년 자동주행 연방령 시행

스위스 또한 도로교통법(SVG) 개정에 이어, 2024년 12월 자동주행 연방령(Ordinance on Automated Driving)을 제정하고 2025년 3월 1일부터 본격 시행에 들어갑니다. 연방령은 고속도로 파일럿(highway pilot), 지정 경로 위주의 무인주행(driverless on specified routes), 자동 주차(automated parking) 등 여러 운용 시나리오를 규정하며, 각 경우에 대해 형식 승인(type approval) + 관할 칸톤(州) 승인을 받은 지정 경로 또는 구역에서만 허용 + 원격 모니터링 + 운영자 또는 원격감독자(operator/remote operator) 체계를 요구합니다.


스위스의 2025년 연방령은 자율주행차의 운행을 단순한 실험 허용이 아니라 정식 등록·운영 체계로 전환했으며, 사고가 났을 때의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함으로써 보험 및 운영 리스크의 불확실성을 크게 낮추었다. 제도는 ‘보유자 우선 책임 이후 시스템 공급자에 대한 구상권’이라는 계층적 책임 구조를 기반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스위스의 접근법은 '예외'를 '표준'으로 바꾸는 데 방점을 둡니다.

* 등록 절차의 정식화: 자동주행 시스템은 더 이상 '특별 허가' 대상이 아니며, 정식 등록 절차를 통해 도로 운행이 가능해집니다.

* 책임 구조의 명확화: 사고 발생 시 책임 소재를 명확히 했습니다. 기존 차주와 보험사의 책임을 유지하되, 자동화 단계에 따른 운영자와 원격 감독자의 법적 의무를 구체화하여 불확실성을 제거했습니다.

스위스는 피해자 보호를 우선해 보유자(운영자)에 대한 배상책임을 유지(Strict liability of holder)하되, 보유자가 제조사 등에게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법적 절차를 마련했습니다.

* 물류 중심 전략: 지하 물류 터널(Cargo Sous Terrain)이나 라스트 마일 운송 등 국가 물류 전략과 법제화를 긴밀히 연계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역설 : 혁신은 빨랐으나 확장은 느리다

독일과 스위스가 이토록 정교한 법안을 마련했음에도, 유럽 전체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국가 간 조화(Harmonization)의 부재 때문입니다.


* 국경의 장벽: 독일 법에 따라 승인받은 레벨 4 트럭이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가는 순간, 그 법적 효력은 사라집니다. UNECE 규정은 공유하지만, 실제 운영 허가권은 각국에 있기 때문입니다.

* 도시 단위의 파편화: 국가 법령이 존재해도, 실제 도로를 관리하는 지자체(Municipality)마다 요구하는 조달 기준이 달라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기 어렵습니다.



유럽의 사례는 자율주행 비즈니스를 준비하는 우리에게 명확한 인사이트를 줍니다.

* 인프라 환상에서 벗어나라: 고가의 센서를 도로에 설치하는 것보다, 공사 구간이나 차선 변경 같은 '동적 도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관리하고 공유하는 체계가 훨씬 중요합니다.

* 틈새시장(Niche Market) 선점: 승용 로보택시보다 셔틀, 청소차, 물류, 폐쇄 구역 서비스가 규제 장벽을 넘어 먼저 상용화될 가능성이 큽니다.

* 규제 대응이 곧 경쟁력: 기술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독일의 'Technical Supervisor' 요건이나 스위스의 '책임 명문화'에 대응할 수 있는 운영 솔루션(Operation Solution)을 갖추는 것이 진정한 경쟁력이 될 것입니다.



https://www.fleeteurope.com/en/autonomous/europe/features/can-europe-move-autonomous-vehicles-pilot-projects-real-streets ​ (접속일 : 202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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