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튤립은 부동산이지 않을까?
인류사의 또 다른 최초 – 버블 튤립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 중에 ‘사람 팔자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꽃에도 ‘꽃 팔자 모른다.’는 식의 표현이 어울리는 꽃이 있다. 바로 튤립이다. 튤립의 원래 이름은 랄레(lale)였다. 지금은 터키의 국화로 자리를 잡은 튤립은 중앙아시아의 텐산(天山)산맥에서 시작되었다.
이란지역인 페르시아로 이어지는 고지대의 거친 들에서 자라는 야생화였다. 11세기 즈음 오스만 투르크제국(이하 오스만)의 전 지역에서 재배될 정도로 보편화됐다. 꽃의 모습이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 머리에 두르는 터번(Turban)을 닮았다고 해서 이를 지칭하는 터키어인 ‘튈벤트(Tülbent)’라고 불렸다. 이게 유럽으로 전해지면서 라틴어에서는 뚜리빠(Tulipa)로 불렸고 프랑스어에서 뚜리퐁(Tulipan)으로 불리다 잉글리시에서 튤립(Tulip)이 되었다.
1550년대 후반 오스만을 여행하던 여행객이 여행기에 튤립을 ‘커다란 양파가 달린 빨간 백합’이라고 표현하면서 알려졌다. 오스만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언어학자이자 외교관이었던 오기르 길랭 드 뷔스베크(Ogier Ghislain de Busbecq)가 신성로마제국의 대사로 있었다. 1555년~1562년까지였던 임기를 마치고 귀국할 때 튤립 구근(뿌리)을 구해 빈으로 가져가 당시 황제였던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I)의 정원에 심는다. 정원을 가꾸는 것을 즐기던 귀족들도 구경하러왔다가 신기한 모양을 가진 튤립의 구근을 분양받아 심기 시작한다.
1593년 레이덴 대학의 식물학자인 카를로스 클루시우스(Carolus Clusius)는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무역을 하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의뢰를 받아 전 세계 식물의 표본을 채집하기 위해 VOC의 지원으로 식물표본실을 대학에 만들고 아프리카, 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가져온 1000여 종의 식물을 심었다. 같은 해 10월 플랑드르의 식물학자 샤를 드 레클뤼즈(Charles de l'Écluse)가 합류한다. 이 때 튤립 구근을 가져간 레클뤼즈는 실험을 통해 네덜란드 기후에 맞게 개량하는데 성공하면서 다양한 종류로 번식하게 된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국적인 모습과 뚜렷한 색상을 가진 튤립에 시선이 쏠렸다. 특히 드물게 ‘깨진 튤립(broken tulip)’이라는 별칭을 가진 튤립이 나타나면서 하나의 꽃에 두 가지 색이 나오는 품종이 비싸게 거래되었다. 거기에 오스만의 술탄이 희귀한 색의 튤립 구근을 구한다는 헛소문이 돌면서 수요가 몰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가장 유명했던 ‘셈페르 아우구스투스(Semper Augustus)’라는 이름의 품종의 구근 하나는 1637년에 5,500길더 선에서 거래되었는데 지금 가치로 1억 원이 넘는 액수다. 지금은 그림으로만 볼 수 있는 이 튤립은 너무 약해 번식이 힘들었다. 20세기에 들어 진드기에 병든 튤립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구근은 시기에 따라 값어치가 달라 교환되는 비율 차이는 있었지만 금과 은 같은 통화로 교환되었음은 물론이고 집을 사거나 밀가루, 호밀, 소, 양, 비어, 와인, 버터 같은 재화와도 교환이 가능했고 신부의 지참금으로 사용될 정도로 값어치를 인정받았다. 이런 현상은 돈이 된다는 이유로 꽃에 과도한 투기를 불러왔다. 어느새 튤립은 정원을 채워주는 꽃이 아니라 투기의 수단이 되었다. 집과 토지를 담보로 구근을 구입하는 등 매매가 성행했다. 버블에 참여한 렘브란트는 그림을 그려서 마련한 돈과 집을 모두 날려 다시 가난한 화가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 받은 심리적인 변화로 인해 그림의 깊이가 더해졌다는 평가를 받으며 재기할 수 있었다.
1634년부터 시작된 지나친 투기로 1637년 구근을 사려는 사람보다 팔려는 사람이 많아져 시장은 붕괴된다. 치솟았던 튤립의 가격은 오름새가 가팔랐던 만큼 내림새도 가팔랐다. 폭락으로 많은 이들이 돈을 잃었다. 이는 거품이 꺼지는 단순한 상황으로 끝나지 않았고 네덜란드의 경제 패권이 잉글랜드로 넘어가는 계기가 된다. 네덜란드에는 선조들의 고통으로 인해 튤립을 재배하는 곳이 많아졌고 지금은 유럽을 넘어 전 세계에 튤립을 공급하는 수출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