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세상을 고른 날
여름의 끝자락, 햇살은 여전히 뜨거웠다.
둘째는 뱃속에서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었고, 나는 순조롭게 만삭을 향해가고 있었다.
나는 결심했었다. 이번엔 조금 더 품어주겠다고.
첫째 때, 나는 38주 2일에 선택 제왕으로 아이를 안았다.
아주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마른 체형으로 자라나는 아이를 보며 마음 한 구석이 늘 쓰렸다.
“조금만 더 품었더라면…” 그 미안함은 엄마가 된 후 계속 내 마음 한 구석에 남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최대한 뱃속에서 오래 품고 싶어서, 39주 0일로 선택 제왕 날짜를 잡았고, 37주까지 일하고 출산휴가에 들어가기로 계획하였다. 일주일 정도는 아무것도 안하고 푹 쉴 생각이었다.
37주 6일, 목요일.
이제 단 하루만 더 일하면 출산휴가였다.
그날 점심에 상사 분께서 식사 자리를 마련해 주셨고, 순산 응원도 가득 받았다.
드디어 곧, 아이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벅찼다.
상사께서 날씨도 더운데 오후엔 재택 하라 하셔서, 천천히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
불덩이 같은 햇살 아래, 길지 않은 거리였건만, 무거운 배를 안고 걷는 일은 생각보다 더디고 숨 가빴다.
중간에 카페에 들러 차가운 음료를 마시며 숨을 고르고, 겨우 집에 도착했다.
그날 저녁, 첫째 딸이 말했다.
“엄마, 아동이 이번 주 금요일에 나와.”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이번 주 금요일은 내일이란다. 아동이는 다음 주 금요일에 나와.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어~”
아이의 말은 그냥 귀여운 상상쯤으로 넘겼다.
딸을 재우고, 나는 마지막 업무 정리를 하느라 밤 11시까지 집에서 야근을 했다.
하루만 더 버티면 된다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다 소파에 몸을 기대는 순간— 배가 사르르, 아프기 시작했다.
아직은 진통 아닐 거야, 그렇지?
하지만 통증은 점점 짧은 간격으로 다가왔고, 병원에 전화를 걸자 “지금 당장 오세요”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 순간, 마음이 붕 떴다. 딸에게 인사도 못했는데. 이건, 꿈일까 현실일까.
새벽 12시, 걸어서 집 앞 병원으로 갔다.
만삭의 몸으로, 밤거리의 적막을 가르며 천천히 걸어가는데 세상이 멈춘 듯 고요했다.
병원에 도착하자, 자궁문이 열려 있었다.
수술은 바로 몇 시간 뒤인 금요일 오전.
아이는 세상을 고르고 있었다. 딸아이가 말했던 바로 그날.
하지만 병실은 만실이었다.
추석 전 주여서인지 모든 1인실은 이미 차 있었고, 나는 1박에 100만 원이 넘는 특실로 배정되었다.
우리 둘째 덕분에 엄마가 특실도 써보네~라고 남편과 함께 웃음 지었다.
분만실에서 대기하며 나는 회사 메일을 열고 마지막 메일을 남겼다.
“죄송합니다. 지금 진통이 와서 곧 출산하게 될 것 같아서 마지막 f/u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 업무는 ~에게 f/u 요청드리고자 합니다.” 웃지 못할 상황이었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끝까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애썼다.
그리고 새벽, 첫 수술로 둘째를 만났다.
수술실에서 사랑하는 아기의 첫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간호사 선생님들은 수술실에서 아동이를 안고 노래를 불러주셨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아동이~ 생일 축하합니다.”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와 간호사 선생님들의 생일 축하 노래가 함께 내 귓가에 맴돌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작은 생명이, 이 아름다운 순간을 위해 그렇게 찾아온 것이다.
아기의 얼굴이 내 뺨에 닿았을 때, 너무나도 벅찬 감정이 밀려왔다.
바쁜 엄마의 뱃속에서 조용히 기다려주었던 이 아이. 기다려줘서 고맙고, 무사히 와줘서 고마웠다.
사람들은 가끔 이야기한다.
“출근하다가 진통 와서 바로 낳았대~” 나는 늘 웃으며 말했다. “그건 워커홀릭 선배들 얘기지. 난 아니야.”
하지만 밤 11시까지 일하다가 둘째를 품에 안게 된 나도 결국, 그 이야기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인생은 언제나 예고 없이 흐르고, 아이들은 그저 스스로의 타이밍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날, 둘째는 스스로의 생일을 골랐고, 신기하게도 첫째는 그걸 먼저 알아챘다.
나는 그렇게 일주일 일찍, 첫째가 알려준 둘째의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