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이 아니라 깊이였다
우리 엄마는 굉장히 헌신적으로, 온 사랑을 다해 나를 키우셨다. 워킹맘도 아니셨고, 언제나 내 곁에 계셨다.
지금도 몇 년째, 엄마는 내 아이들을 봐주시느라 나와 함께 생활한다. 엄마가 손주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문득 깨닫는다. 엄마가 나를 얼마나 큰 사랑으로 길러주셨는지, 이제야 조금 짐작이 간다.
나는 어린 시절 유난한 아이였다.
친척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아유, 아주 대단했지. 엄마밖에 몰랐잖아." 모이면 꼭 나오는 이야기다.
엄마 품만 찾고, 다른 사람 품엔 가지도 않았다.
엄마가 잠깐 장을 보러 나가면, 나는 베란다에서 엉엉 울며 엄마를 찾았다.
아빠가 옆에 있어도 소용없었다. 그날의 나는, 엄마만 원했다. 아빠도 아직 그 장면을 기억하시고 종종 웃으며 말씀하신다.
성인이 되어 서울에서 자취하던 시절, 주말에 엄마 아빠가 올라오셨다가 돌아가실 때면 나는 여전히 헛헛하고 슬펐다. 돌아가는 차를 바라보며, 당장이라도 따라가고 싶어 눈물이 고이곤 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어 보니, 내 감정의 뿌리를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깊어졌다.
그때 나는 왜 그렇게 애타게 엄마를 찾았을까, 지금의 나는 왜 여전히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걸까.
아이를 키우면서, 나와 너무나 닮은 딸을 바라볼 때 비로소 나는 나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게 어떤 결핍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고민도 했다.
하지만 곰곰이 돌아보면, 엄마는 언제나 한결같은 사랑으로 나를 안아주셨다.
그러면서 요즘은 그것이 결핍 때문이 아니라, 나의 기질과 감정의 깊이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은 저마다 타고나는 기질이 다르다.
어떤 아이는 부모가 방에 없어도 잘 놀지만, 어떤 아이는 부모의 미세한 표정 변화만으로도 불안을 느낀다.
나는 후자였다.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존재 자체가 엄마에게 닿아 있어야 안심이 되는 아이였다.
나는 사람과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기질을 타고났다.
건강하고 깊은 애착은 때때로 큰 분리불안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엄마가 그만큼 중요하고 소중하기 때문에, 조금만 떨어져도 견딜 수 없는 감정이 드는 것이다.
이것은 결핍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만큼 엄마가 나의 세계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나는 감정을 깊이 느끼고, 강하게 표현하는 아이였다.
사랑을 너무 많이 느꼈고, 그 사랑이 소중해서 잃을까 봐 두려웠다.
엄마가 늘 곁에 있었는데도 유난히 엄마만 찾았던 그 시절의 나는, 이상한 아이가 아니었다.
사랑에 깊고, 감정에 민감한 아이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기질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지금 나는 아이의 감정을 살피고, 감정의 미세한 결을 읽고, ‘엄마’라는 역할이 무엇인지 매일 성찰하며 살아간다.
이제 딸이 나를 껌딱지처럼 찾을 때, 그 모습 속에서 내 유년 시절이 겹쳐 보인다. 그래서인지 어딘가 묘하고 복잡한 감정이 함께 밀려온다.
사랑을 깊이 느끼는 마음은 어릴 땐 ‘유난’이라 불리지만, 사실 그것은 누군가를 정말 사랑해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다. 나는 그런 아이였고, 지금은 그런 엄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