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봄이 오고 있었다

내 곁을 감싸는 공기의 흐름이 바뀌는 날

by 다정한 마음결

오늘, 내 곁을 감싸는 공기의 흐름이 바뀐 느낌이었다.

어제까지와는 조금 다른 결.


어제까지 나는 정말 치열했다.

마지막 1분 1초까지 쥐어짜듯 일을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몇 달간 이어온 큰 프로젝트가 끝났고, 어젯밤 도착한 “수고했다”는 메일을 보는데 마음이 툭, 내려앉았다.
아, 잘 끝났구나. 그 문장 하나에 몇 달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어제는 사무실 방을 옮기기 전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몇 년을 앉아 일하던 자리를 비우고, 서랍과 책장을 다 정리했다.

정리하다 보니 치열했던 나의 시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동안 수행했던 수많은 사건 기록들, 수많은 책들

코로나로 직접 전해주지 못하였던 내 청첩장, 그리고 둘째의 초음파 사진까지.

일과 삶이 함께한 자리였다.


이번에는 사실상 팀 이동이었다.

내가 더 즐겁게 일했던, 더 잘 맞는 팀으로 가게 되었다.


같은 회사지만 다른 챕터.
짐을 싸면서 아쉽다기보다는 뭔가 한 계절을 지나온 느낌이 들었다.


어젯밤에는 어머님, 아버님께서 우리 집에 오셨다.
아버님이 아이들 앞에서 책을 읽어주시는데 너무 웃기게 읽어주셔서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은 까르르 웃고, 나는 그 장면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아, 이런 게 가족이지.


그리고 오늘은 2월의 마지막 날.
햇살이 유난히 따뜻했다.

몇 달 만에 겨울이 물러난 느낌이었다.


동향인 우리 집은 겨울이면 빛이 잘 들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달랐다.

유난히 밝고 붉은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남편과 함께 바라봤다.

우리 집 안으로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는 계절이 오고 있었다.


날이 좋아 정말 오랜만에 아이들과 단지 한 바퀴를 돌았다.
멀리 가지도 않았다. 그냥 단지 안을 천천히.

놀이터도 가고, 바로 뒤에 있는 산도 올라가 보고.


밖에서도 요새 둘째가 가장 빠져 있는 있는 놀이인 “꼭꼭 숨어라.”를 했다.

둘째는 아직 "꼭꼭"이라고만 말한다. "꼭꼭"! "꼭꼭"! 이렇게 외치면

아이들은 몇 번이고 숨고, 나랑 남편은 일부러 못 찾는 척하며 시간을 끌었다.

찾았다! 하면 까르르 웃는다. 그 투명한 해맑은 웃음이 참 예쁘다.


요즘 나는 늘 다음을 생각했다.

일, 유학, 자리, 부동산. 앞을 보며 살았다.


그런데 오늘은 느리게 흐르는 시간과, 따스한 햇살과,

남편과 아이들이 한 프레임 안에 다 들어온 장면이 그 자체로 충분했다.

아, 이거면 된다.


밤에는 아이들을 재우고 오랜만에 혼자 산책을 했다.

그제야 동네가 보였다.
“여기 이런 카페가 있었네.” “이런 식당도 있었구나.”

같은 길인데 내가 너무 바쁘게 지나가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며칠 뒤면 둘째도 어린이집에 간다.
나도 새로운 층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고.
분명 변화의 문턱인데 이상하게 불안하지 않았다.


내 마음속 겨울도 함께 지나가고 있었구나.

나는 봄을 꽤 오래 기다렸던 것 같다.
겉으로는 잘 버티고 있었지만 속은 조금 얼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급하게 달리지 않아도 되고, 다 증명하지 않아도 되고,

그냥 이 가족의 일상 안에 서 있어도 되는 느낌.

멀리 가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편안해졌다.


아마 봄은 갑자기 오는 게 아니라, 이렇게 공기가 먼저 바뀌면서 오는 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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