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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고 있는 여름, 사직서를 쓰고 싶었다

인사한 줄 남기고 조용히 사라지고 싶었다

by 홍매화



나는 헬스장 인포데스크에 앉아 여름을 보냈다. 에어컨은 늘 최대로 틀어져 있었고 회원들의 땀 냄새와 운동복, 웃음소리와 신음 소리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은 "안녕하세요"를 반복했다.

"사물함 번호 잊어버렸어요." "오늘 다 떨어졌어요" 반복되는 질문들 익숙한 대답, 그리고 웃는 표정. 이 모든 것들이 내 하루의 전부였다. 시간은 지나가고 있지만 나는 그 속에서 늘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여름은 천천히 아무 예고 없이 사라지고 있다. 그걸 제일 먼저 알려준 건 바람의 방향도 기온도 아닌 회원님들의 옷차림이다. 반팔 대신 얇은 바람막이, 운동 후에 땀이 덜 나는 사람들. 나는 그 여름이 부러웠다. 아무 말 없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우는 그런 계절이라서.

별일 없던 오후였다. 회원 출입이 뜸해진 시간. 나는 컴퓨터를 열고 메모장을 열었다. 그리고 천천히 세 글자를 적었다. 사직서. 이유는 아무도 묻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이유가 너무 많고 너무 사소해서. 그냥 지쳤다고 말하면 뻔하고 가을이 오기 전에 사라지고 싶었다고 말하면 너무 시적인 변명이 될까 봐.



그 뒤에는 아무 말도 적지 못했다.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이유를 딱 잘라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냥 너무 한자리에 오래 있었던 것 같았다. 한자리에. 누군가 운동을 시작하고, 체중을 줄이고, 땀을 흘리고, 성취감을 느끼고 다시 돌아오는 그 순환의 끝에 나는 늘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조금은 낡은 체중계 옆에서 조용히 계절이 바뀌는 걸 바라보는 역할. 어쩌면 나는 내 인생의 인포데스크에 너무 오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시작을 매일 안내하면서 정작 내 시작은 미뤄두고 있었다는 걸.



퇴사를 결심하고 마지막 며칠 동안은 늘 하던 일에 조금 더 집중하게 되었다. 인포데스크의 작은 책상 위에 수건과 출입카드, 간단한 안내문을 정리하고 메모지에 내 손글씨로 몇 줄 적었다. "수고했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누군가 내 자리를 이어받을 테고 그 자리에는 또 다른 하루가 쌓일 것이다.

사실 인수인계는 단순한 업무 전달 그 이상이다.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 더 편안하게 만드는 일이다.

회원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떠올리며 내가 느꼈던 작은 기쁨을 전하고 싶었다. "이 시간대는 회원님들이 자주 오세요." "이 노래 틀면 분위기가 좋아져요." 말하지 않아도 알 법한 말들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새롭고 소중한 정보라는 걸 안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나만의 작은 비밀 노트를 남겼다.



마지막 날의 자리를 생각하며 정리한다. 여름이 그렇게 사라지듯 나도 떠나지만 내가 남긴 작은 조각들이 누군가의 하루에 작게나마 머무르기를 바란다.

떠난다는 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그래서 인수인계는 작지만 따뜻한 다리다.

밖은 아직 뜨겁지만 공기엔 분명 가을의 입자가 섞여 있었다. 그 사실이 왠지 쓸쓸하게 기쁘다. 여름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나도 어디론가 흘러가고 싶었다. 그냥 여기 말고 어딘가. 그 이유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며칠 후 내가 그만둔다는 이야기가 회원님들 사이에 퍼졌다. 의외였다. "진짜 그만두세요? 정이 많이 들었는데 아쉬워요." 웃으면서 말하는 회원님도 있었고 짧은 정적 뒤에 "수고 많으셨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 반응들 속에서 잠시 멈췄다. 늘 익숙하던 내 자리가 누군가에겐 일상의 일부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냥 조용히 사라질 줄 알았다. 인포데스크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그저 배경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그만둔다고 말하자 익숙한 얼굴들이 아쉬워했고, 어떤 회원님은 작은 선물까지 건넸다. 내가 남긴 게 없을 줄 알았는데 회원님의 하루에는 분명히 내가 있었다.



나의 여름은 그렇게 떠났다. 나도 그렇게 사라지고 싶었다. 익숙한 인사한 줄 남기고 조용히, 다만 내가 누군가의 기억에 남을 줄은 몰랐다. 그 사실이 어쩌면 이 여름의 가장 조용한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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