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슴도치의 변명
나는 나쁜 버릇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한 뒤에도 그 일이 안 풀리면 철저하게 짓밟는 습관이 바로 그것이다. 마음으로는 계속 노력하고 집중하고 싶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내 본심이 더 이상 노력해도 무의미하도록 그 일을 망쳐놓는 것이다. '아 이제 노력해도 안되는구나..' 싶도록 말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겪었던 몇몇 친구들과의 다툼, 그 뒤로는 몇몇 사람들과의 연애와 회사생활도 그러했던 것 같다.
어렵지만 많이 호전되는 느낌의 일들이 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사람과의 관계, 밀고 당기는 듯한 사랑의 질척거림, 그리고 내가 조금 더 참아버리면 될 것만 같은 회사의 일들. 그렇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의 희생이 필요한 일들이다. 그러한 일들을 대함에 있어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생각되면 나는 그걸 파괴하려고 했다. 술 따위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파괴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고, 상대에게 필요 이상의 잔인한 말로 상처를 주기도 했으며, 일의 경우에는 어느 순간부터 그냥 안 해버리기도 했다. 한때는 치기로, 한때는 취기라고 생각했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아야지,라고 되뇌면서 말이다.
하지만 요즘 드는 생각은 이건 철저한 고의이고 고약한 버릇이라는 점이다. 내가 상처받고 싶지 않고 다치고 싶지 않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혹은 세상에게 칼날을 세웠다고 생각한다. 나는 무른 속살을 숨기려고 가시를 세우는 고슴도치 같았던 것이다. 나름 세상의 매몰참에 맞선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론적으로 보면 그저 회피했다.
파괴적인 비겁함에 한숨을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