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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함무라비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지만, 조금은 둥근 박차오름을 꿈꿉니다.

by 츤데레
세상에 당당히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거의 없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물론 일부 특권계층에서 태어나서 다이아몬드 내지는 플래티넘 수저를 물고 있는 분들은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일반적 시민들의 경우에는 그럴 수가 없다. 당당하게 원하는 것을 말하고, 바른 것을 말한다는 것은 굉장한 Risk-Taking이자 우리나라의 사회문화적 구조 상 전형적인 High Risk Low Return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도 주변보다는 할 말은 꼭 다 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나를 시원시원하고 똑 부러진다고 생각하였고, 나를 불편해하는 지인들은 피곤한 놈이라고 비아냥 거렸다. 어른들은 나를 당돌하지만 재밌게 보거나, 사사건건 말대답하는 놈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설령 내가 진짜 옳고 내가 원하는 바가 합리적이어도, 바른말이 말대답이라는 표현처럼 난 그렇게 인식되었다. 그래서 호불호가 꽤나 갈렸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호불호는 갈린다. 다소 가끔은 조금 심할 정도로) 그래도 어쩌겠나, 맞는 건 맞는 거고 아닌 건 아닌 건데!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의 20대 중반까지의 삶이었다.


긴 회사 생활은 아니었지만, 사회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처음엔 하고 싶은 대로 했다. 내 소신대로, 그리고 모두가 상식적으로 인정할 만한 사실에 근거해서 말하고 행동했다. 신입사원이라는 나름 관심받는 대상이다 보니, 윗사람들은 나에게 뻔한 질문들을 많이 했다. 거기에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냥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이야기했다. 상대가 어른들이기에 당연히 예의는 지키면서 말투도 조심해가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답변의 콘텐츠나 스탠스는 그들의 원하는 일반적인 그것들과는 큰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너는 회사에 왜 다니니?"


"돈 벌러 다니죠 뭐, 월세도 내야 되고 하니까요."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그러면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해? 회사에서 일할 때"


"흠 조직에서 주어진 일을 해야죠. 근데 저는 6시 이후의 삶이 더 중요해요, 회사 이후에 제가 살 수 있는 삶이요."


"재밌는 놈이네. 이런 대답은 처음인데 참 솔직해."


이런 식의 대화가 주를 이루었다. 대리, 과장급 상사들부터, 본부장급의 임원들과의 대화에서도 저렇게 말했다. 그들은 내 솔직함에 오묘한 감탄을 했으며 놀라기도 했고, 혹자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다. 그래도 난 그들의 말을 워딩 그대로 받아들였다. 솔직하고 재밌다니, 나쁘진 않은 대답이군. 정도의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주변에서 '당돌한 말대답러'에 대한 뒷담화적인 조리돌림이 가해졌던 것 같다. 나의 친한 동기 H와 선배 M에게 '너 소문이나 평판은 좀 별로야, 뭐 좋게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라는 식의 이야기를 들었다. 인사팀 직원 몇몇은 나를 불편한 반동분자 취급하기도 했다. 뭔가 조금씩 어그러지는 느낌은 받았지만 나는 굴하고 소신껏 살았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나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내부에서 친한 동기 및 동료들이 나를 좋게 생각해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솔직함의 대가는 피곤함이었다.

열심히 하고 일 자체도 많이 했는데, 그리 결과론적인 평가는 좋지 못했다. 짜증도 많이 났지만, 내가 소신껏 행동한다는 명목 하에 보이는 이미지를 관리 못한 탓이기에 별다른 이의제기는 하지 않았다. 솔직한 당시에는 편하고 후련했지만, 그런 말들이 초래하는 결과는 정말이지 피곤했다. 원래 같으면 일일이 설명하거나 따졌을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는, 특히 사회생활에 있어서는, 사실이나 진심보다는 상대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는 것이 권장된다는 것을 15개월 일하고 그만둘 무렵 깨달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레 깨닫는 것을 난 왜 이리 데고 나서야 알게 된 걸까. 이런 생각 때문에 힘들었던 적도 많이 있었다. 단지 평가 점수나 몇몇의 뒷담화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앞으로 내가 어떤 일을 하건 결국엔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로 귀결되기 때문에 앞으로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비단 나중에 다른 회사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결국 내 일을 해도 사람들과 상대하며 살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내 생각이나 소신대로 그들을 대하지 못하고 적당히 비위 맞추는 거짓된 느낌의 삶을 살기 싫었다. 그런데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요즘 느끼는 확신이고 대다수가 공유하는 상식이기에 힘들었다. 아니, 지금도 힘들다.




KakaoTalk_20180421_071446347.jpg 가장 기억에 남는 한 구절이다. 논리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법보다 시간이 위대함을 깨달을 수 있기에.


소설 <미스 함무라비>에서 등장하는 박차오름 판사는 할 말을 할 줄 아는 어느 때나 당당한 소신을 지닌 초임 판사이다. 방법도 나보다는 다소 과격해서 직접 지하철 성추행범을 잡기도 하고, 엄숙하고 보수적인 법원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출근하기도 한다. 약간의 사회생활에 찌든 나는 그러한 돌발적인 행동에 불편함을 조금 느꼈지만, 동시에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다.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인과응보적인 결론을 이야기하고, 강자한테 강하고 약자한테 약해야 존경받는 판사를 꿈꾸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이지 시원시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끝났으면 그저 편히 읽고 마는 책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랬으면 나도 읽고 글까지는 쓰지 않고 넘겼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랜 경력을 가진 현직 부장판사인 작가는 여러 생각할 거리를 제시한다. 법대로 하는 것이면 무조건 옳은가, 무엇이 강자고 무엇이 약자인가 등, 우리가 막연하게 상식이라고 생각하고 넘겨버리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오랜 판사 경력으로 이론과 실제적 상황에 빠삭한 그이기에 쓸 수 있는 글일 것이다. 그러기에 이 책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약간의 픽션을 가미한 법원 내부 에피소드들을 다룬 수필이나 칼럼 같다. 드라마틱한 위트 이면에는 인간의 본질, 법률가로서의 고민, 그리고 사회생활의 생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박차오름을 꿈꾼다.

다만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박차오름 판사처럼, 그리고 예전의 나처럼 표현하는 것은 시원시원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에게도, 소중한 주변인들이나 사회의 정상적인 고지식함을 믿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도 상처나 불편함을 줄 수 있다. 그렇기에 모난 돌직구를 솔직함이라는 용기로 포장하고 싶진 않다. 그저 내 성격에 맞는 쉬운 방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조금 더 완곡해질 필요가 있다. 모난 면이 개성이고 성격이고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조금 마모시킬 수도 있는 노릇이다. 마모시키면서 둥글어지고, 그러면서 단단해진다. 상대방의 상식에 상처 주지 않으면서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따스한 완곡함이 무엇일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고민해봐야 한다. 정확한 답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설령 존재하더라도 나에게는 정답이 아닐 수도 있기에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오늘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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