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뷰티 인사이드>를 보고
외모가 매일 바뀐다면 어떨까.
가끔은 매우 좋을 수도, 대개 별로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성별과 인종까지 바뀌어버린다면? 두 말할 필요 없이 매우 혼란스러울 것 같다. 하나의 광고 영상에서 시작되어 영화로 제작된, 그리고 지금은 드라마로도 방영 중인 <뷰티 인사이드>의 기본 플롯이다. 'Beauty Inside'라는 제목은 어떤 모습이라도 내면의 아름다움과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을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영화의 기본적인 뼈대는 그러하지만, 중간중간 잘생긴 배우가 우진 역에 분했을 때 이수(한효주 분)와 잘 되는 것은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영화에 대한 논란은 대개 그런 곳에서 발생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를 10번 이상 본 사람으로서 조금 더 이면에 집중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영화란 2시간 안팎의 시간 동안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되는 매체이기에 굉장히 스피디한 전개가 필요하고 이해가 직관적이어야 한다. 외모지상주의 속에서 살아가면서 미남미녀 배우들이 연기하는 로맨틱 코미디에 익숙한 관객들을 상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잘은 몰라도, 감독은 살짝 영롱하고 뽀샤시한 분위기로 아름다운 화면을 뽑아내는 것에 강점이 있는 분인 것 같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진욱이나 박서준 같은 배우들이 비교 우위에 있었을 것이다.
변명 혹은 변호는 이쯤 하고, 영화가 품고 있는 내재적인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영화는 시작부터 모습이 계속 바뀌는 남자 우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수의 관점에서도 전개되긴 하지만 대부분이 그의 관점이다. 처음 영화를 보게 되면 이러한 설정이 그저 재밌지만, 영화를 보면서 느껴졌던 것은 그가 품고 있는 고통이다. 어떠한 여자라도 하루 이상 만날 수 없기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전개되는 것을 접어야 하는 남자. 그는 본인의 처지에 아예 단념해서 친구조차 상백(이동휘 분) 단 한 사람뿐이다. 가족 하고도 거리를 적당하게 두면서, 세상에서 고립된 남자가 바로 우진이다.
그는 혼자 가구 디자인을 한다. 본인은 밀실에서 가구를 디자인하고 만들고, 친구인 상백이 회사 운영을 하기에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원래 그렇게 내향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과의 교류가 없다면 미칠 노릇일 것이다. 굳이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클리셰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그는 잘 생긴 남자로 변했을 때 친구 상백과 술을 마시러 전전하며 시간을 낭비한다.
그러한 그의 모습과 관계없이 그에게 한결같은 여자가 있다. 가구 편집샵의 직원 이수이다. 잘 생기건 못 생기건, 남자건 여자건, 늙건 젋건 그녀는 그에게 똑같은 사람이다. 그녀는 물론 우진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고객을 대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자로 잰 듯한 일정한 친절은 우진에게 다르게 다가왔다. 이수는 우진과 대척점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반대가 끌리는 이유라는 게 그런 것이다. 매일 바뀌는 남자는 절대 바뀌지 않는 여자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자신이 절대 가질 수 없는 가치를 가진 존재는 그 사람에게 빛나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둘은 만났고, 치열하게 사랑했고, 쓰라리게 헤어졌다. 아마 관계를 시작할 때부터 그들은 결말을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감정에 솔직한 사람들이었고,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했다.
그렇기에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환자분은 그분을 알아보실 수가 있나요?
자기가 먼저 알아보겠다고. 말없이 제 손을 잡으면 그게 자기인 줄 알라고.
근데요 선생님, 그 사람이 제 손을 잡을 때 쳐다보면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저를 보고 웃고 있어요. 그러면 저도 그냥 웃어요. 익숙해지려면 하루가 너무 짧아요.
신경정신과 전문의가 물어보고, 이수가 위 같이 답한다. 매일매일 바뀌는 연인의 모습을 알 수 없는 그녀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지만 부질없게 느껴진다. 이내 무기력해지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어디 있는지 맞춰보라는 우진의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냥 유머일 수도 있는 일이, 그녀에게는 너무도 무겁게 다가온다.
그렇지만 이 둘은 결국 재회한다. 시간이 오래 흐르고 장소는 지구 반대편인 체코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엔딩 씬은 이러한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물론 잘-생긴 배우 유연석이 엔딩씬을 장식하기에 결론적으로는 외모지상주의가 아니냐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배우는 영화라는 이야기를 표현할 뿐이다. 그 이면에 주목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영화 속에서 이수를 마주했던 수많은 우진들이 이수에게 다가가며 키스한다. 그러면서 영화는 끝난다. 외모가 달라진다고, 우진이가 우진이 아닌 것은 아니다. 누구나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 이러한 상황이 펼쳐진다면 모두가 아연실색하면서 상대방을 믿지 못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익숙한 것을 좋아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두려워한다. 우리의 두려움은 모두 우리의 무지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익숙지 못한 것, 즉 통제권이 우리에게 없는 것들을 파괴하고 외면하려는 경향이 있다.
영화라는 장르가 주는 작위적인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두려움을 극복해낸 연인의 모습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진과 함께 하는 삶은 이수에게 폭풍보다도 거친 무언가 일 수도 있지만, 우진이 없는 평화를 버리고 그녀는 그 길로 향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봐왔던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살아간다. 그들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섣부른 전제하에서 말이다. 그렇지만 외모는 익숙하더라도 내면은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한껏 따스한 사람이라도, 차디차게 날이 선 면모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항상 웃고 있는 사람도 잊지 못할 상처를 품고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항상 하나의 일관된 모습만 가지고 살아가는가. 답은 간단히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겉만 그대로일 뿐, 수 없이 다른 자아로 변화하며 사람들을 대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려고 하면 할수록 피로감만 더해진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가슴으로 인정하는 것이 관계에서 필요함을 이수를 통해 영화는 말하고 있다. 신경안정제로도 안되던 일들이 아름다운 결말로 귀결되는 것은 관계를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수의 대사 중 하나를 인용하면서 글을 줄이고자 한다.
어쩌면 매일 다른 사람이었던 건, 네가 아니라 내가 아닐까.
스틸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