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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츤데레 May 04. 2018

러브 미 이프 유 데어

너무나 이기적인, 혹은 너무나도 헌신적인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너무 평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영화는 잘 보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서까지 피곤해지기에는 이미 내 머릿속이나 삶은 충분히 피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기덕, 홍상수 감독 등의 영화는 보지 않는 편이다. (일련의 사건들이 터지기 전에도 쭉 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런 부류 중에 인상 깊은 영화가 있다. 러브 미 이프 유 데어 (Love Me If You Dare)라는 제목으로 개봉한 영화가 바로 그것이다.

- 약간의 스포일러를 함유하고 있습니다. 참고하시길


이 작은 깡통 하나가 두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




Jeux D'Enfants

영문판 혹은 번역 제목보다는 프랑스 원어 제목 (Jeux D'Enfants)이 더 영화를 잘 표현한 것 같다. '아이들의 놀이'라는 제목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내기'라는 소재를 군더더기 없이 보여준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은 끊임없이 내기를 한다. 초등학교 시절 스쿨버스 기사가 없는 버스를 움직이게 하는 걸로 시작된 둘의 내기는 끝날 줄 모른다. 더 압권인 것은 정도도 모른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정도 등. 거의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신경 쓰면서 사는 요소들을, 저 두 사람은 깔끔하게 외면해버린다. 내기가 시작되는 순간 소피와 줄리앙에게 세계는 없어진다. 오로지 그 둘만이 존재할 뿐이다.


정말이지 밑도 끝도 없다. 징할 정도로.


처음으로 이 영화를 본 것은 고교시절이다.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 본 것은 아니고, 그저 프랑스어과였기에 해당 수업시간에 본 것이다. 그때의 기억으로는 영화가 정확히 이해되지 않았다. 초반에 적당한 장난을 치던 꼬마의 모습까지는 귀엽고 재미도 있었다. 프랑스 영화 특유의 색감이나 감성도 느껴져서 더 좋았다. 그렇지만 어른이 되어가며 펼쳐지는 두 사람의 내기는 눈살을 찌푸려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내기를 위해 가장 친한 친구에게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주고, 이에 대한 회답으로 상대의 결혼식을 망쳐 놓는 모습. 달려오는 기차 앞에서 두 눈을 가리고 목숨을 건 도박을 치르는 두 사람. 정말 미쳤다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10년은 두 사람에게 그다지 짧은 시간이 아니었던 것 같다.


10년 뒤에 재회해도 소피와 줄리앙은 똑같다. 아니, 그동안 참았던 걸 더욱 밀도 있게 풀어냈다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레벨의 광기가 펼쳐지니 말이다.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들며 내기가 주는 짜릿함을 좇던 둘은 결국 쏟아지는 시멘트 속에서 끝을 맞이한다. 티격 거리면서 내기에 목숨을 걸어온 것은 우정이나 극단적인 승부욕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둘은 너무도 늦게 확인했다. 그게 사랑임을.


정상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정상과 비정상을 명쾌하게 정의 내리는 것은 쉽지 않고, 섣부르게 이름 짓고자 했을 때에는 논리적인 시비보다는 다수결의 원리가 결정을 주도하기 때문이다. 뭐가 맞는지보다는, 어떤 걸 사람들이 많이 하느냐가 우선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사람들에게 두 사람이 보여주는 행동에 대해 물었을 때 이 둘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정도로 소피와 줄리앙은 일반적이지는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보다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 그런 장난이 그립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미쳤다고까지 생각했던 둘의 모습을 그렇게 쉽게 단정 짓기 어렵다는 사실을 말이다. "Cap ou pas cap? (내기할래?)"로 시작하는 두 사람의 대화가 광기 어린 이기적인 모습만 갖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지금까지 수차례 이 영화를 보면서, 나 역시도 소피와 줄리앙의 사랑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불장난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영화적으로 예쁘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격려의 빈말 조차 해줄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몇 번의 연애가 지나가고, 나이를 먹은 뒤 본 영화의 여운은 또 달랐다. 지금 내가 보는 저 둘은 예전과 다르게 미치광이가 아니다. 소피와 줄리앙은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오롯이 서로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또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나 세상에 있어서는 이기적일 수 있지만 서로에게는 한없이 헌신적이었고, 상대와의 관계를 위해 모든 걸 던질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상황이 어떻고, 주변이 저떻고 핑계나 뱉어낼 줄 아는 대다수와는 다른 '진성 사랑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한 사랑을 꿈꿨다. 

지금은 한국 사회에서 소위 어른들의 사랑이나 연애란 마음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많이 깨지면서 배웠다. 그렇지만 이번에 영화를 보면서 내가 꿈꾸던 사랑의 모습은 저런 게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소피와 줄리앙처럼, 마음만으로 모든 게 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시험이 산재할 때에도 서로 징징거리면서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고, 퇴근 후 자투리 시간에서까지 감정을 소모하면서 서로를 갉아먹듯 싸워도 장기적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가 많이 내릴 수는 있지만 마음만 있다면 결론적으로 길게 보면 땅이 굳는다고 믿었던 부류이다.


나한테는 매 순간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먼저였고, 전부였다. 내 삶이 영화는 아니었기에 저렇게 다이내믹하거나 불법을 거듭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충분히 나는 모든 걸 쏟아부었다. 날 것 그대로. 한국의 사회문화적인 테두리 내에서의 줄리앙 정도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지만 나의 연애는 항상 파국으로 치달았다. 나도, 그녀도 원하지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만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또다시 생각해본다. 

내 삶의 전부를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채우는 것이 맞을지 고민하고 있다. 밀당이라는 요소를 차용하여, 삶과 사랑 간의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으면 우리 사회에서는 좋을 것 같다. (굳이 엄밀히 말하자면 좋을 것 같다기보다는 편할 것 같다.) 그렇지만 나라는 사람의 성격 및 특성상 그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좋은비님(@goodrain)의 글에서 보았듯, 내 삶을 모두 소모하지도 쪼개지도 않는 제3의 길을 택하고자 노력 중이다. 내가 나 자신으로써도 행복하지만 상대방과 함께함으로써 더욱 완벽해지는 관계. 내 삶의 전체가 100이라면 상대와 사랑함으로써 그 삶의 외연이 100 이상으로 넓어질 수 있는 그런 연애를 꿈꾼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나와 상대방의 노력도 핵심적이지만, 그러한 상대를 만났을 때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 같다.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인연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나 혼자서도 마음의 평화를 견지하면서 스스로 행복한 안정된 자아가 될 수 있게 발버둥 치고 있다. 조금은 차분하지만 나 자신을 잃지 않는 한국적 줄리앙이 되기를 꿈꾼다. 


소피와 줄리앙을 연기했던 마리앙 꼬띠아르와 기욤 까네는 이 작품 이후에 실제로 결혼했다. 현실에서의 그 둘의 사랑에는 다양한 요소가 껴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가 주는 감정적인 여운이 사소하지는 않았으리라 감히 짐작해본다.








스틸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senscritique, myfilmviews, alaprochainene
https://www.senscritique.com/film/Jeux_d_enfants/437844 
http://www.myfilmviews.com/2016/05/03/jeux-denfants-2003-review/ 
http://www.alaprochainene.com/arts-entertainment/jeux-denfance-love-me-if-you-d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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