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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츤데레 Apr 19. 2018

2. 아빠 혹은 아버지

가장이지만 가장 소외된 존재에 대한 항변

나는 나의 아버지와 친하지 않다.


물론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친밀하거나 애틋한 관계는 아니다. 한 시간 정도 같이 차를 타고 어디를 가는 동안에도 우리 둘은 말이 없다. 어머니가 비운 집을 지키면서도 우리 둘은 말이 없다. 심지어 같이 장을 봐도 말이 없고, 산책을 해도, 그냥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을 해도 말이 없다. 친한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한 대화의 양이 아버지와의 대화 1년 치보다 많을 정도이다. 거의 30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우리는 그랬다. 앞으로도 그럴 것만 같다.


다들 부자지간은 그렇다기에 그런 줄만 알았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집안의 아버지와 아들이 다들 이렇다는데, 굳이 이상함을 느낄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고민을 거듭해보니 내가 조금 거리를 두는 이유는 또 있었던 것 같다. 비단 성격 차이나 우리나라 문화가 주는 관계의 소홀함 이외에도 말이다. 나의 아버지는, 그는 정말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착한 사람을 싫어 한다. 착한 사람과 멍청한 사람은 대개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착하지만 둔한 아버지와 외유내강 스타일의 똑부러지는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나는 사람 좋은 착한 사람의 이면을 보고 자랐다. 허허실실 웃는 좋은 사람, 묵묵히 스스로의 젠틀함을 견지하는 남자가 얼마나 주변을 피곤하게 하는지를 보았다. 다툼을 피하고자 많은 것을 잃고 가장 가까이에서 챙겨야 할 사람들을 지치게 하는 것 또한 두 눈으로 봤다. 


그래서 내가 생각했던 가장의 모습은 아무래도 조금 더 투쟁적인 모습이었을지 모른다. 아내의 손에 먼지를 묻히지 않게 하고자 내 손을 더럽히고,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보이더라도 싸우는 모습. 나는 뒤치닥거리를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그런 식으로 어깃장을 놓았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다소 복합적인 어색함이 가지고 있는 아픔을 나에게 속삭여 준 것은 세월이었다. 또래에 비해 흰머리도 거의 없던 아버지가 염색을 하는 모습은 나에게 정말 크게 다가왔다. 관심을 가지고 보니 흰머리뿐만이 아니었다. 건치라고 자랑하던 치아도 임플란트를 이미 몇 개 하셨고, 만성피로는 달고 사셨다. 나와 비슷했던 체격은 야위었고, 주름은 북유럽의 피오르드처럼 가파르고 깊게만 패여갔다. '우리 아빠는 원래 그래',라고 이야기하면서 넘겼던 나이지만, 이제는 원래 그런 게 아님을 깨달았다. 




순간 무서웠다.


그리고 그 공포는 더 심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에게 화도 잘 못 내신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가 그 포인트다. 안 내시는 것일 수도 있지만, 꾹꾹 참다가 한 방에 터지는 성격을 내가 모르지는 않는다.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국지전이 많았다면,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는 전면전이었다. 어릴 때는 회초리를 많이 맞았고, 커서는 싸우다가 지쳐서 자취방으로 그냥 나가기도 했던 것 같다. 예전에는 서로 대화가 안 통하니 (그리고 대화 자체를 잘 안 하니) 그러겠거니 하면서 포기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보니 이젠 좀 알 것 같다. 나와 나의 아버지는 서로를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이제라도 방법을 알아가고 싶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공유하는 취미는 전무하고, 취향도 상반된다. 성격도 무던하고 둔한 아버지에 비해, 나는 내 생각이 분명하고 상당히 예민한 편이다. 더욱이 어릴 적부터 나와서 살아 일찍 독립한 아들이기에 자주 볼 일도 없다. 게다가 그 아들은 몇 번 시도해보고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하면 말 자체를 참아버리는 별종이다. 


그나마 다행인건 요즘 내가 어느 정도 아버지의 태도에 뒤늦은 동의를 표한다는 점이다. 싸우지 않고 당하고 웃을 수 있는 처지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사회 생활을 해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조그마한 일에는 다투지 않고 묵묵히 침묵하는 것이 최대한 정답에 가까운 결과를 낸다는 것도 전 여자친구와 소소한 일로도 크게 다투면서 알게 되었다. 의도했건 의도치 않았건, 우직한 침묵은 더 큰 메시지와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강한 사람이었고, 쎈 척하며 잘난체 했던 나는 끝없이 약한 사람이었다.


신영복 교수님의 말씀인데, 요즘 아버지의 뒷 모습을 보면서 새삼 되뇌인다.




고민이 많았다. 그리고 지금도 많다. 계속 생각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가장 가까운 관계 중 하나인 부자지간의 관계가 관심과 애정으로 가득 찰지.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막연한 생각에 그래도 자주 연락을 드리고는 있다. 최근에 스마트폰으로 바꾸셔서 카톡도 종종하곤 한다. 이러한 소소한 노력으로 합리화하고자 함은 아니다. 다만 그런 작은 시도 하나하나가 마중물이 되어, 관계를 따스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크리스마스 즈음 보낸 아버지의 서툰 카톡 메시지를 인용해보고 싶다.


"아들 아빠다 수고 많았다 사랑해"


나도 저런 말을 자주 하는 아들이 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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