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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츤데레 Aug 08. 2018

모든 것은 한 끗 차이

사실 세상은 우리랑 관계없이 그대로이다.

나와 관계없이 세상은 존재한다. 


내가 있건 없건 그 시스템은 나름의 규칙에 따라서 충실하게 움직인다. 내가 없어도 서울시의 대중교통 시스템은 나름 완벽하게 운영되고 있고, 마포구의 거리는 상당히 깨끗하며, 신촌의 술집들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나는 하나의 개인으로써 그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점이란 상당히 중요한 것이다. 

세상의 일들은 그 자체로써 가치중립적인 것들이 상당히 많지만, 나라는 인간이 그것을 수용할 때 그렇지 못하다. 내 기준에 따라서 변질되기 때문이다. 변질이라는 단어의 뉘앙스가 기본적으로는 좋지 않은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현실의 팩트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변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 굳이 사용했다. 그만큼이나 세상의 일들보다는 내가 견지하고 있는 관점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개인적인 경험을 몇 가지 써보고자 한다. 그 당시에는 정말 짜증 나고 화나고 억울하기까지 했던 일들도 있다. 그렇지만 지나고 보니 대부분 의미가 있는 일이었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고마운 일들이 많다.


 



#2016년_7월

당시 나는 강남구에 있는 외국계 회사에서 인턴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금융권이다 보니 나름 포멀하게 입는다고 비즈니스 캐주얼을 입고 다녔다. 그래서 매우 더웠다. 안 그래도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인데 말이다. 게다가 그 날따라 지하철도 놓쳐서 집 근처에서 해야 할 일도 잘 못하게 된, 정말이지 꼬인 상태였다. '5분만 서둘렀으면 되는 일인데',라고 나는 되뇌었다. 그렇지만 일개 인턴 따위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고, 나는 꼬여 버린 스케줄 속에서 길을 잃고 속으로 욕이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연을 우연이 아니게 하는 것은 노력이라는 관점 변화 아닐까, 싶다.


그렇게 터덕터덕 신촌역에 내려 걸어가다가 그녀를 만났다. 용기를 내어 번호를 물어봤고, 그녀는 약간 망설이다가 11자리 숫자를 내 휴대전화에 찍어주었다. 그리고는 4개월 정도 그녀를 만났다. 항상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오랜만에 감정적으로 누군가를 좋아해 본다는 기분을 받았다. 오래 만났던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러던 차에 잠시나마 그녀를 만났고, 어느 정도는 감정적으로 성장했다고 믿는다.



#2016년_12월

취준이 끝났다. 그리고 여름에 시작됐던 연애도 끝났다. 그래서 뭔가 자꾸만 휑했고, 친구들과 술 마시며 놀기 바빴다. 거의 매일 달리다 보니 생활도 불규칙해졌고, 춥다는 핑계로 놀 때 말고는 집에 있으니 하루하루 체력이 깎여 나갔다. 적은 나이도 아니었으니 뭔가 축축 늘어지는 게, 술 말고도 다른 걸로 풀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조금 더 보편적으로 건전하다고 평가받는 취미를 찾다가, 캘리그라피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별이 준 선물이 20개월 동안 성장해서 이렇게 되었다.


서예를 하면서 난을 치는 선비의 느낌으로 임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꾸준히 1년 반 넘게 한 결과, 이젠 나름 괜찮게 쓴다. 공허하기만 했던 이별의 기억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2018년_5월

퇴사를 하고, 인도에 갔다. 보통 자아를 찾아 많이 간다고 하던데, 나는 굳이 그런 의미부여를 할 만큼 진지하게 떠나진 않았다. 다만 혐오스러울 정도로 지치는 회사생활과 더불어 새로이 겪은 따끈따끈한 이별에 대한 후유증에서 조금은 벗어나고 싶었다. 장소를 바꾼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익숙한 서울이 눈 밖에 나면 조금 덜 할 것만 같았다.


나는 원래도 엄청 긍정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상당 부분 낙관적인 편이었다. 내가 노력을 하고 있으면 결국은 잘 되겠지, 하는 마음을 갖고 살았다. 그리고 대부분 (시련이나 굴곡도 꽤나 있었지만) 그렇게 되었고, 뿌듯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회사생활을 하면서 그런 포인트도 없어졌다. 팀장이나 상사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 전체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될수록 무기력함을 느꼈다. 내가 뭘 한다고 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적성과 미래, 그리고 금전적 이슈까지 더해지니 짜증이 심해지고 분노가 늘었다. 그리고 낙관은 개뿔, 쇼펜하우어를 능가하는 염세주의적인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땐 A부터 Z까지 모든 게 싫었다. 이래서 싫고 저래서 싫고, 그렇기 때문에 화가 나는 식이었다.


사회에서 만났지만 동료 내지는 친구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지나고 나서 감정이 조금 가라앉고 거리를 두게 되자 달리 보였다. 


여전히 일적으로는 내키지 않는 곳이지만, 그곳에서 만난 소중한 사람들이 더 중심적으로 생각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에 나와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들이고 내가 싫어하는 공간을 매개로 만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가끔씩은 조금 거리를 두려고 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만날수록 그들은 그 장소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별개의 사람들이었다. 함께 한 시간이 이젠 어언 2년이 되어간다. 지금도 연락을 하고, 종종 밥을 먹고, 술도 마신다. 그러면서 나는 그들이 동기가 아닌 친구임을 느낀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하다.

나름 아픈 이별을 했다고 생각하고, 회사에서도 우여곡절도 겪었고, 지금 나와서도 이것저것을 헤매며 진로탐색을 하고 있다. 누군가는 현재의 내 삶을 아홉수라서 헤매는 것이라고 정의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이젠 조금 다르게 보는 법도 배웠다. 어느 정도는 '새옹지마'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고흐의 말처럼 언젠간 해가 다 뜨더라.


현재의 나에 대해서는 '더 늦기 전에 내가 가는 길의 방향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고 발버둥 쳐볼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의미 있다'라고 생각한다. 방황을 시작한 덕분에 여행도 할 수 있고, 하고 싶던 공부도 독학으로나마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고민을 많이 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브런치에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게 된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너무 한 면만 보지 말고, 양 쪽 면을 다 보려고 노력하며 사는 편이다.  


이러한 사고가 지나치게 결과론적이며, 어떻게 보면 합리화에 대한 강요라고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이야기하는 바는 강요가 아니다. 다만 그 편이 더 살만 한 것 같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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