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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멀어지지 않은 당신들 중에

대화

by 미립

루시아 벌린의 소설집 <내 인생은 열린 책>에 '벚꽃의 계절'이라는 소설이 있다.


주인공 카산드라는 매일 같은 패턴의 삶을 사는 가정 주부로, 맷이라는 아이를 키운다. 남편 데이비드 -나의 영어 이름이기도 하다- 는 출판사에서 일하며 가계를 책임지고 있다. 카산드라는 매일 맷과 함께 지나는 길에서 늘 같은 시각에 정확히 같은 곳을 지나며 반복되는 삶을 사는 우체부를 본다. 그는 그 우체부를 보며 반복되는 일상의 숨막히는 답답함을 느낀다. 마치 똑같이 되풀이되는 자신의 일상을 보는 것만 같다.
카산드라는 데이비드에게 자신의 감정을 얘기하지만, 되돌아오는 건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핀잔과 함께 '우체부'가 아닌 '우편집배원'이라는 잔소리 뿐이다. 어느 날 카산드라는 평소의 루틴을 조금 파괴하는데, 그로 인해 우체부를 거의 죽일 뻔한 상황에 처한다. 카산드라가 그 일을 데이비드에게 말할 때, 조금 과장하여 "여보, 내가 우체부를 죽였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데이비드는 카산드라가 하는 말에 관심이 없다. '우편집배원'이라며 단어 사용을 지적하는 데이비드. 그리고 카산드라는 "데이비드, 제발 나하고 이야기 좀 해."라고 말하며 소설은 끝이 난다.


몇 페이지 되지 않는 이 짧은 소설에서, 작가는 제대로 대화하지 못하는 부부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상대방이 전달하는 감정에 귀 기울이지 않고 남자는 사소한 단어 사용을 지적한다. 그는 자신의 힘겨움을 토로하는 상대에게 '나도 힘들다'며 손쉽게 방어해버린다. 그의 편의주의적 태도를 볼 때, 나는 뒤통수가 뜨끔했다. 대화는 말하고 듣는 것인데, 가끔 듣는 것의 의미를 잊을 때가 있다. 말하는 사람의 감정, 의도, 상황을 이해하려는 태도, 즉 관심이 결여된 듣기는 대화의 구성품이 아니다.


잘 대화하기 위해 아내와 나는 오랜 시간 노력했다. 많이 다투고, 사과하고 화해했다. 감정이 상해도 어떻게든 이야기하고 이해하려 애써왔다. 여전히 가끔은 저마다의 이유로 상처를 주고 다시 아물기도 하지만, 이제는 어떤 문제가 있어도 대화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우리 사이에는 깔려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부분의 경우에 여전히 대화가 어렵다고 느낀다. 아내, 그리고 가끔 우연히 마주치는 대화가 잘되는 누군가가 아니면 대부분의 타인과의 대화에서 듬성듬성 뚫려있는 허점을 마주한다. 그것은 상대가 나와 얼마나 오래 알아온 사이인가와는 다른 이야기다. 예를 들면 이런거다.


나 : (네가 시킨대로) 누나랑 얘기해봤는데, 아버지 생신 선물은 랩탑을 하나 사드리는게 좋을 것 같아. 고성능이 필요하신 건 아니어서, 저렴한 거 하나 돈 모아서 같이 사기로 했어.

아내 : 그래? 잘했네~ 근데 누나 지난 번에 발목 다치신 건 좀 어떠시대?

나 : 아… 발목? 그건 안 물어봤는데…
나 : J가 다음 달에 제주도 여행 온다고 시간 맞으면 같이 밥먹자는데 어때?

아내 : 아 그래? 좋지~ 재밌겠다! 애들은 잘 크고 있대? 같이 오는 거지?

나 : 아… 애들? 그건 모르겠네…


이럴 때면 나는, 아직까지 내 곁을 떠나지 않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언젠가부터 나는 관심이 결여된 텅 빈 언어 교환을 대화라고 착각해왔던 것 같다.


대화란 참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진심어린 관심을 전제로 하기에 그렇다.


오늘은 대화의 그 첫 단계를 시작해보려 한다. 아직 멀어지지 않은 당신들 중에 한 사람부터.





[커플북] 주말 부부는 그뭐냐, 그거다. 제주편 - 아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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