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연애를 하던 시절, 하루의 마무리는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쳐 노곤해진 기분을 한껏 담은 목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말을 할수록 말똥말똥 정신이 맑아지는 사람이라 이미 잠의 저 편에 발을 담가 한껏 몽롱해진 남자친구를 향해 ‘5분만‘을 외치며 본의 아니게 괴롭히곤 했다.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고 늘 5분만큼은 넉넉히 내어주던 착한 남자친구는 지금의 남편이 되었고, 남편은 우리가 주말 부부가 된 이후 추억의 ‘5분만’ 고문을 다시 당하고 있는 중이다.
결혼하기 전 누군가 이상형을 물어보면 주저 않고 ‘난 똑똑한 사람.‘이라 말하곤 했다. 그 말과 함께 나이를 먹고 있는 지금 와 돌이켜 생각해 보니 알게 되었다. 어렸던 내가 말한 똑똑한 사람이란,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늘,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관이 있는 사람을 동경했고, 동경은 여과 없이 관심으로 자랐다. 남편은 또래에 비해 대화의 주제가 다양한 사람이라 찰떡같이 말하면 콩떡같이 알아듣고 되받아 쳤고, 적당한 농담으로 분위기를 유하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우린 연인이 되어서도 특별한 도구가 없이도, 오로지 둘의 입놀림 만으로도 신나게 잘 놀았다. 카페에 앉아 커피 한잔만 있어도 두세 시간은 술술 떠들었다. 데이트를 하며 영화를 본 날은 엔딩 크래딧이 올라가면서부터 이미 열띤 토론을 시작했다. 이야기가 길어져서 지하철 앞까지 갔다가 이야기를 좀 더 하고 가자며 출구 바로 앞 맥주집에 앉아 서로의 생각의 격차를 마음에 들게 조율한 후에야 시원한 마음을 품고 헤어진 날도 있었다. 어떤 주제로 대화를 해도 수렴과 발산이 이루어내는 아름다운 파장을 그려나가는 사이. 우리가 세운 연인의 정의였던 것 같다.
요즘 우리의 화두는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이다. 오래전부터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나. 사회생활을 할 때는 무언가 쑥스러워 티를 내지 않는 편이지만, 남편에게는 이미 들킨 지 오래라 오히려 다른 전략을 택했다.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작품을 남편에게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것. 왜냐하면 그래야 함께 그 콘텐츠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까. 최근 혼자 주중의 나날을 보내는 남편이 문득 무료함을 내비쳤던 날. 기회는 찬스다! 를 외치며 <진격의 거인>을 슬쩍 내밀었고, 남편은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리고 며칠 걸리지 않아 마친 남편과 유튜브로 온갖 리뷰 영상을 챙겨보며 대화의 축제를 벌이고 있다. 요즘은 언제 함께 다시 정주행을 할지 시기를 정하고 있다. 아 짜릿한 행복:-)
대화의 커플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싸운다. 연애 초반에도 6개월 동안은 티격태격 싸우기만 했다. 우리는 동갑 커플이고 연인이 되기 전부터 오래 친구였다. 그렇기에 단 한 번도 경어를 사용하는 사이가 아니었는 데다 연결된 이야기의 주제가 많아서 싸울 것도 많았던 듯싶다. 하지만 연인의 정의를 다시 내렸듯, 싸움의 정의도 다시 정립했다. 싸움은 건설적인 대화를 하며 새로운 차원으로 관계를 이끌어 가는 것이라고. 감정의 다툼을 번질 때도 있지만, 그럴 땐 누군가 정신을 차리고 산으로 가는 듯한 대화를 다시 중심으로 불러들인다. 물론 대화가 겉돌 때도 있고, 전진하지 못해 답답하고 서운해 속상해지기도 한다. 그마저 우리는 있음 직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 여기게 되었다.
이게 맞다. 주말 부부를 하며 더욱 확신했다. 서울에 있는 남편, 제주에 있는 나. 부부는 홀로 존재해도 단단하고 완전한 존재여야 오래 행복할 수 있다. 각자의 하루를 잘 쌓아 올려 주말에 만나는 성숙한 어른이어야 하므로. 함께 발을 맞출 때 보폭, 속도, 몸의 기울기 등 조율해야 하는 조건이 많다. 그 시작이고 끝에 대화가 있다.
오늘도 어떤 일 때문에 남편을 설득하고 있다. 실패하면 접지 않고 주제의 수명을 길게 잡고 천천히 시간을 둔 채 결정을 유보한다. 오늘내일만 볼 사이가 아니니까 , 상대에게 시간을 주고 그 사이는 양질의 대화로 채운다. 우리의 의사 결정이나 선택의 최종 전에 말을 뿌리고 심고 싹을 틔운 뒤 수확하는 열매의 결실을 확인한다. 그것이 우리 부부의 진지함의 근원이다.
결혼을 결심한 때 우리 둘은 서로 동의했다.
성숙한 부부의 신중하고 차분한 결정의 시작에 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커플북] 주말부부는 그 뭐냐, 그거다. 서울 편 - 남편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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