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몇주 전이었다. 집문서를 찾으려 서재방 박스들을 뒤적이다가 의문의 빨간 선물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는 부동산 서류가 들어있을 만한 사이즈가 아니었음이 분명해 보였지만, 나는 홀린 듯 그 상자를 꺼내어 뚜껑을 열었다. 상자에는 온갖 색깔의 편지봉투들이 가득했다. 빨간 봉투, 하얀 봉투, 노란 봉투... 크기도 참 다양했는데, 그 중 하나는 손가락 마디 하나만한 작은 빨간 봉투 여덟개에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작은 편지지가 나왔다. 아내가 쓴 편지였다. 작은 편지 하나에 한 문장 씩, 번호 순으로 이어지는 여덟개 한 세트의 편지였다. 원래 찾으려던 문서는 하얗게 잊고 한 동안 편지를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5년의 연애와 10년의 결혼 생활 동안 아내가 내게 건네준 손글씨들이 빼곡했다. 말랑말랑한 마음을 조물락거리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우린 편지를 참 많이 주고 받았다. 생일이라서, 새해 첫 날이라서, 크리스마스라서, 연애를 시작한 날이라서, 연애를 끝내고 결혼한 날이라서. 이유는 많았다. 초콜릿과 사탕 대신 책을 주고 받기로 한 발렌타인데이(+화이트데이)에는 책에 짧은 편지를 쓰기도, 또는 책과 함께 편지를 써서 전해주기도 했다. 결혼을 한 이후에는 1년 내내 붙어있는데도 잠시 떨어져 있는 언젠가 틈을 내서 펜을 들고 끄적였다. 편지를 전하고 받을 때마다, 대체 이걸 언제 쓴걸까, 하는 의문이 스쳤다.
편지를 쓰려고 앉으면 금세 진지해지곤 했다. 관계를 되돌아보고, 추억을 곱씹으며 이 사람이 내게 얼마나 큼지막한지 새삼 깨달아졌다. 마주보고는 못할 몽글몽글한 표현들이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는 그림처럼 그려졌다. 물성을 가진 언어가 종이 위에 그려진 뒤에는 그것이 되려 나의 희뿌연 감정을 정의하곤 했다.
그래서 편지를 쓰는게 좋았고, 받는게 좋았다. 내가 한 단어를 고를 때 얼마나 고민했는지를 알기에, 아내가 쓴 편지를 볼 때에도 종이와 펜과 오른손과 아내의 인중이 한 곳으로 동그랗게 모여드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 한 줄에 담긴 감정의 무게가 얇은 종이 위에서도 충분히 느껴졌다.
오늘 제주 동쪽을 여행하다가 하얀 강아지가 그려진 엽서 세 장을 샀다. 세 장의 엽서는 아내의 예쁜 글씨와, 나의 못난이 글씨가 쓰여질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줄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의 보물 서랍에 상대방이 그 때 가진 마음의 무게를 담아서 오래도록 간직될 것이다.
[커플북] 주말 부부는 그뭐냐, 그거다. 제주편 - 아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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