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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지 마 죽지 마 편지할 거야

편지

by 홍지이


꾸준히 말이 없는 사람, 그는 내 남편. 예전에는 그는 왜 이리 말이 없을까, 그 이유에 대해 속시원히 알고 싶어 이리저리 고민했었다. 꽤 오랫동안 살펴보니 그는 무뚝뚝해서도, 딱히 할 말이 없어서도, 갖고 있는 어휘가 빈곤해서도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넓고 깊다. 그 안에 담아둔 말이 고이고 잠겨 오래 곁에 둔 생각으로 자란 듯싶다. 그 또한 너무 많아서, 짙은 떨림에 요동치는 그들의 메아리를 하나의 소리로 모아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 한 세월을 보내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말에서는 대체로 책 사이에 끼워둔 지난해의 단풍이나 꽃잎에서 나는 과거의 냄새가 나는 듯하다.

어떤 단어와 문장을 앞세워야 할지 고르느라 말들의 귀환이 더딘 느낌. 그 느낌을 반복하며 학습했고, 결국 익숙한 감각으로 진화했다. 이제는 먼 곳에서부터 타박타박 걸어올 그의 말들을 기다리는 것이 그리 힘들지 않다. 시간을 버티고 견뎌온 근성을 가진 생각들을 마주하는 것이 난 오히려 좋다. 타인에게 함부로 닿으려 하지 않는 섬세함, 섣불리 내딛지 않는 신중함이 묻은 말과 살아온 그의 눈빛과 마주하며, 이미 40이 다 된 나는 어느 지점에서는 아직도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성숙하기 위해, 숙련되기 위해 낱개의 말들 마다 다른 시차를 둔 그의 생각에 귀 기울이는 방법도 자연스레 배우게 되었다. 더 이상 날아가지 않을, 휘발되지 않을 말들을 낚아채 시간과 공간에 가둔다. 그것은 주로 종이에 앉혀두는 글, 대체로 편지의 형태로 분한다.


언젠가 만나야 할 사람과 지켜야 할 약속이 줄어들어 지금보다 단순한 하루를 살게 된다면, 지금껏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주고받을 편지들을 시간 순으로 이어볼까 싶다. 발전하는 기술이 사람의 생각을 따라잡는다 해도, 이보다 촘촘하고 확실하게 재현하지는 못할 듯하다. 생일이나 기념일이면 선물보다 편지를 먼저 찾아 읽어야 하는 우리는, 편지에게 마음의 일부분을 의탁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단정하고 확실하여 때론 예언 같기도 한,

결코 끝나지 않을,

또한 마르지 않을,

그 마음들이 나를 따른다. 난 조용히 그 말을 주머니에 챙겨 넣거나 어깨에 두르고 또 말이 없는 과묵한 그의 옆에 선다.

약속과 신뢰의 언어가 얼거나 죽어나는 믿음 대멸종 시기에도, 오래 전 태어난 그의 말은 나를 또 무수히 깊고 진한 말을 누리며 살게 한다.

[커플북] 주말부부는 그 뭐냐, 그거다. 서울 편 - 남편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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