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그녀는 풍물패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곱게 자란 서울 부잣집 자녀같은 느낌이어서 고상하게 플루트를 불거나 피아노를 칠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예상치 못한 북치고 장구치고의 등장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침착하게 마치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것처럼 나도 풍물패에 관심있어, 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거짓말이었다. 나는 풍물패가 어떤 악기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사물놀이와는 뭐가 다른지도 몰랐다. 단지 그녀와 같은 동아리에 들어가서 더 자주 마주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관심이 있는척, 일단 내뱉고 나서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조금씩 흥미가 생기기도 해서 나중엔 원래 내가 이 쪽에 관심이 있었던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이제막 오리엔테이션을 마친 대학 신입생 시절, 그러니까 스무살 때의 일이다.
결국 그녀를 따라 풍물패 신입 단원이 되었다. 고작해야 일곱명, 여덟명이었나. 풍물패는 인기있는 동아리는 아니어서 모임이 단촐했다. 수업이 끝나면 학교 건물 옥상에서 안녕 안녕 여러분 안녕, 에 맞추어 장구를 쳤다. 봄바람이 아직 차가웠을텐데 스무살 신입생들에게는 적당히 시원하고 설레는 날씨였다. 몸이 따끈따끈해서 그랬던 모양이다.
계획대로 나는 (나는 정말 유명한 J형 인간이다) 그녀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같이 장구를 치고 술을 마셨다. 조금 취기가 오른채 같이 지하철을 타고 광역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 밤길을 걸으며 끝이 없을 것처럼 대화를 나눴다.
우리는 좋아하는 것들이 많이 닮아있었다. 영화, 음악, 시. 취향의 교집합만으로 할 얘기가 참 많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녀의 취향이 참 넓어서 나의 취향을 두 손으로 담고도 남았던 것인데, 스무살의 나는 그런 건 몰랐다. 그래서 취향이 금방 사랑이 되었다.
그녀를 집 앞에 데려가 주고 돌아가는 길에 (정말 유명한 J형 인간인 나는) 그녀와 조금씩 가까워지다가 연인이 되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스무살의 관계는 계획대로 잘 풀리지 않았다. 나의 감정과 다르게 그녀의 감정은 우정에 가까웠다. 그걸 알게된 나는 금방 마음을 접었다. 그녀는 내 스무살 생에 처음 만난 너무 완벽한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두어달만에 풍물패를 나왔다. 다른 동아리 활동에 전념하겠다는 빤히 보이는 핑계를 댔다. 당연한 얘기지만 장구를 더이상 못쳐서 아쉽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다. 그건 처음부터 내 취향이 아니었으니까.
그녀와는 몇달 정도 어색하게 거리를 두고 지냈다. 그러다 다시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때 그녀에겐 남자친구가 생긴 상태였다. 어쩌면 당시 그녀의 취향을 나보다 더 깊게, 진실되게 공유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 뒤로도 나는 취향이 맞는 사람을 찾아다녔다. 취향이 통하면 금세 사랑에 빠지곤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나의 엑스들이 나와 취향이 비슷했던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취향은 맞춰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결국엔 취향 그 자체인 사람을 만나 신나게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결혼이 우리 취향이 아닌 것 까지 우리는 취향이 맞았다. 그 사람은 스무살의 내가 두달간 장구를 치게 만든 그녀다. 그녀는 결국 대학 졸업때까지 장구를 쳤으니, 우리에게 가장 안 맞는 취향이 있다면 그건 풍물일지도 모르겠다.
[커플북] 주말 부부는 그뭐냐, 그거다. 제주편 - 아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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