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견
2020년 3월 10일 저녁이었다. 강남 주택가 골목에 차를 대고 내렸다. 2~3층 정도 되어 보이는 빌라 건물 앞으로 임시 보호자의 품에 안긴 하얀 강아지가 등장했다. 강아지는 겁이 잔뜩 나서 임시 보호자의 옷에 소변을 줄줄 흘렸다. 몸을 웅크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던 하얀 털보는 많이 쳐줘야 내 허벅지만해 보였다. 케이지안에 미끄러지듯 쏟아넣은 후 차 뒷자리에 실었다. 임시 보호자와는 정신없이 인사를 나눈 후 얼른 집으로 차를 몰았다. 반려견 무늬를 만난 첫날이었다.
그로부터 5년 하고도 7개월이 지났다. 무늬의 견생에서는 우리 부부와 함께한 시간이 그렇지 않은 시간보다 곱절 이상으로 길어졌다. 생각해보면 7개월 전, 제주살이를 시작하며 주말 부부가 되기 전까지, 나는 무늬와 떨어진 적이 거의 없었다. 무늬를 입양한 뒤에 우리는 그 좋아하던 해외여행도 한 번을 안갔다. 가까운 일본까지 포함하면 한 해에 평균 4번 이상 해외 여행을 갔으니, 5년 간 한 번의 해외여행도 없었던 건 우리에겐 급격한 변화였다. 그나마 내가 무늬와 떨어져 있었던 건 2박 3일의 경력 사원 교육 두 번과, 2주일짜리 브라질 출장 한 번이 다였다.
그러니까, 10년을 함께 산 아내와 떨어져 사는 '주말부부'가 된 것 못지않게, 5년을 함께 산 반려견과 떨어져 사는 '주말보호자-반려견'이 된 것도 우리에겐 큰 변화였다.
처음엔 집으로 오는 길 자체가 어색했다. 원래 우리 가족의 루틴은 이랬다. 나는 퇴근과 동시에 나의 예상 도착시간을 아내에게 전송한다. 그러면 아내는 그 시간에 맞추어 무늬와 함께 나갈 준비를 한다. 도착역 두 정거장 전에 나는 아내에게 현재 위치를 보고한다. 그러면 아내는 차 뒷자리에 무늬를 태우고 나를 픽업하러 출발한다. 우리는 거의 정확한 시간에 지하철역 출구에서 만난다. 나는 조수석에 타고 우리 세식구는 무늬의 저녁 산책을 하러 근처 공원을 향한다. 함께하는 저녁 산책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세레모니였다. 비로소 직장모드를 '오프'하고 일상모드를 '온'하는 버튼이었다. 그러고나면 우리는 집에 와서 저녁을 먹었다. 음식 냄새를 풍기면 무늬를 식사하는 우리의 옆에 와서 아내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빠안히. 뭐라 하지도 않고 그저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면 우리는 한 입 먹고 무늬 한 번 보고, 또 한 입 먹고 무늬 한 번 보다가 안되겠다, 하고 간식을 꺼내 주곤 했다.
루틴이 사라진 퇴근길에는 쓰잘데기없는 유투브 소리가 끝도 없이 고막을 때렸다. AI버블론의 실체, 뉴욕시장에 무슬림이 당선된 이유, 청년들은 왜 부산을 떠나나, 같은 짤막한 시사 유투브 아니면 런닝맨 류의 예능 클립이었다. 수상할 정도로 사람이 많은 마을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하면 빙글빙글 돌며 나를 반기는 하얀 강아지 대신에 언제나 기대 이상인 철저한 고요함이 집 안에 가득했다.
이제는 홀로하는 퇴근길도 많이 익숙해졌다. 집 안의 고요함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적응이 잘 되지않는, 문득문득 낯설고 생경스러운 느낌이 드는 건 오히려 출근할 때의 어둠이다.
우리 세식구가 함께 있을 때, 우리는 함께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에서부터 무늬를 안고 주차장으로 갔다. 무늬를 뒷자리에 태우고, 나는 조수석에 탔다. 아내는 나를 지하철역이나 셔틀버스 승강장에 내려주고 무니의 아침 산책을 하러 떠났다.
이제는 혼자 집을 나선다. 토도도도 걷는 강아지의 리드줄을 잡을 일도, 하얀 털복숭이를 안고 엘리베이터를 탈 일도 없다. 나의 출근 시간을 잡아먹고 실컷 길어져버린 밤 때문에, 출근 준비를 마치고 불을 끄면 집 안에는 온통 블랙이 가득하다. 현관의 센서가 반응하기까지의 몇 초, 그 시간이 참 길다. 나의 아침이 혼자라는 걸 분명히 알려주는 너무도 선명한 블랙이다.
가끔은 너무 어두워서 휴대폰 화면을 켜고 현관을 비춘다. 그러고 나서 문득 휴대폰을 돌려 화면을 바라보면 하얀 강아지가 그 속에서 나를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다. 아직 제주도에서 곤히 자고 있을, 세상 걱정이라는게 없을 나의 하얀 털복숭이다.
[커플북] 주말 부부는 그뭐냐, 그거다. 제주편 - 아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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