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견
비가 오는 날이면 기울어진 처마 아래나 커다란 나무 밑에서 옹송그리고 있을 수만 개의 작고 동그란 등을 생각한다. 그중 제법 작은 동그라미였을 무늬는 우리와 함께 산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맛있는 간식을 주면 아직도 코로 흙을 퍼내는 시늉을 하며 땅에 묻으려 한다. 아껴서, 숨겨서, 좋아하는 걸 티 내지 않고 몰래 좋아하며 살아남았던 아이라 그렇다.
책 <사랑은 분명 강아지 모양일 거야>에서도 한 차례 밝혔지만, '무늬'는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주인공 아이 moonee에게서 빌려온 이름이다. 디즈니랜드 중앙의 성 꼭대기가 보이는 모텔 '매직캐슬'에서 어린 엄마와 장기 투숙 중인 moonee. 작은 꼬마는 또래 중 가장 의젓하고 어른들에게 말발로 밀리지 않을 만큼 당차다. 언젠가 꼭 한 번 디즈니랜드에 가보는 게 소원이기에 입장권을 사기 위해 매일 아이스크림 자판기 아래 떨어진 동전을 주워 모은다.
무늬를 입양을 하겠다는 우리 부부가 (개다운) 애교가 없이 뚱한 무늬를 보고는, 분명 금방 취소하겠다며 돌아올 줄 알았다는 입양 담당자의 예상과 달리 우린 햇수로 6년째 함께다. 대부분의 자극에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무늬를 향해 사람과 소통 혹은 교감이 어려울 것이고, 어쩌면 심리 치료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소견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가죽 소파보다는 폭신한 러그가 좋고 확고한 취향도 갖게 되었고 자신 있게 드러내며 보호자에게 요구하는 '상전' 강아지가 되었다. 자동차로 하는 장거리 여행도 거뜬히 해내고, 배 타고 제주 여행은 이미 여러 차례, 비행기도 몇 번 탄 경험을 상기하며 '모험왕'이란 별명도 갖게 되었다.
정말 그랬다. 사람과 한 번도 살아본 적 없어 보였던 무늬는 모든 게 서툴고 느렸다. 조바심 내지 않고 우린 무엇이든 무늬의 속도를 따랐다. 무늬가 준비가 되었다면, 마음을 먹었다면 시작될 변화, 작은 시도를 살피며 발을 맞춰가기로 했다. 이는 이미 입양을 고민했을 때부터 결정한 태도인데, 결혼 전 가족과 함께 반려했던 동생 솔이에게 남발했던 '기다려'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했다. 똑똑한 솔이는 '기다려'를 잘 알아 들었다.(그 외에도 매우 많은 단어를 알아들었다.) 발 앞에 간식을 두고도 먹으라는 말이 떨어지기 전까지 기다리는 게 귀여워서 지꾸 시켰다. 그리고 늦게까지 신나게 놀고 와서는 현관까지 마중 나온 아이에게 '언니 기다린 거야?' 라며 내 사정에 맞춘 칭찬만 했는데, 몰랐다. '기다려'로 소진하기엔 얘네들의 시간은 덧없이 빠르게 사라진다.
무늬는 제주로 이사 온 후 오빠(남편. 무늬에겐 오빠다.)를 전처럼 매일 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해 개의치 않아 하는 줄 알았다. 평소에도 누굴 찾거나 없다고 짖는 아이도 아니었거니와, 원래 서울에서도 나와 보낸 시간이 월등히 더 많아 "오빠 외출이 잦네. 귀가가 늦네." 정도로 인지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요즘 자세히 보니 서울에서 오빠가 오면 안 하던 행동을 종종 한다. 이를 테면 잘 안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물고 와 던져달라고 하거나, 우리 둘이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에 들어와서 팔짝팔짝 뛰며 장난을 친다거나, 자주 가는 산책길에서 안 가본 스폿으로 오빠를 끌고 간다거나. 사소하고 미묘한 변화를 알아채고 난 이후에 남편에게 말해줬더니, 은근 기분 좋아하고 있다.
난 우리가 한때 무늬와의 사랑이 있던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질 사람이 될 거란 걸 안다. 안다고 달라질 건 없지만, 최소한 지금 앞에 놓인 이 사랑은 더 소중히 여기고, 잘할 수 있지 않을까. 더 잘하고 싶다. 노벨 사랑상이 있다면 꼭 받고 싶을 만큼. 촘촘히, 성실하게, 하얗고 투명하게.
[커플북] 주말부부는 그 뭐냐, 그거다. 서울 편 - 남편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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