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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Nov 01. 2016

가마쿠라 팜스, 고독한 서퍼의 조건

서퍼가 파도를 기다리듯, 나도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여행 매거진 BRICKS City - 작은 술집 #4


 “파도 소리가 귓가를 때려 잠을 잘 수 없었어.” 다자이 오사무는 소설 <사양斜陽>을 집필하기 위해 이즈伊豆의 바닷가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여자는 내 인생의 흑점이 되었지.” 다자이 오사무는 이즈에서 지내는 내내 18년 전 가마쿠라鎌倉 해변의 공허했던 파도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여자, 다나베 아쓰미는 열아홉 유부녀였다. 그들은 최면제 칼모틴을 한 움큼 삼키고서 가마쿠라 해변 작은 여관에 누워 파도 소리를 듣고 있었다. 여자는 죽었고, 다자이는 살아남아 가마쿠라 시 시치리가하마 요양소에 수용되었다.



 전차가 시치리가하마 역에 닿았다. 나는 승강장에 내려 차장의 손에 차표를 쥐여주고 거리로 나왔다. 태국풍 음식점 옆에 오코노미야키 집이 있고, 그 옆에 나의 숙소인 팜스가 있었다. 1층 레스토랑에서 열쇠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갔다. 일을 핑계로 온 휴가니 먼저 오늘치 일을 끝내야겠지. 하루 15장의 원고를 수정해야 집으로 돌아갈 때 이번 달 일의 절반을 해치울 수 있다. 방안에는 테이블이 없었다. 나는 노트북과 종이 뭉치를 챙겨 1층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문 앞에는 해변 휴양지 분위기의 소품과 잡지들이 놓여 있고, 카운터에는 SURF라 적힌 하늘색 티셔츠가 걸려 있었다. 테이블에 앉아 일감을 정렬하자, 이런 분위기에선 여지없다는 듯 Jack Johnson의 <Hope> 전주가 나왔고, 세상에나, 스쿠터에 서프보드를 실은 20대 사내가 때맞춰 지나갔다. 나는 하와이풍 맥주라는 Mucho Aloha 한 캔과 소 곱창이 들어간 토마토 스튜를 주문했다. 실수였군, 선선히 인정하며, 스튜 한 술을 꿀꺽 삼켰다.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고 바라는 편이 나을 거예요."_Jack Johnson 'Hope'


 다자이 오사무는 동경대 불문과에 들어갔지만, 불어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졸업, 취직 다 가망 없는 소리였다. 소설도 지지부진, 올해가 마지막이니 모쪼록, 하면서 형님에게 받아내던 생활비는 졸업이 미뤄질수록 더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약물 중독자였고, 빚은 그가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빚을 다 갚기 전엔 죽을 수 없다고, 술에 취해 말하지만, 그 술값마저 꾸어야 하는 삶. 하루하루 목숨이 연장될수록 숨쉬기가 버거워지는, 인간 실격자였다. “나는 죽음을 예감하고, 지금까지의 인생을 적기로 했다.” 그의 유서는 <만년晩年>이라는 제목을 달고 출간되었다. 그는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책이 죽을 수 있는 여유를 베풀었다. 시치리가하마 요양소를 나온 지 5년째 되던 해 그는 다시 가마쿠라로 갔다. 파도 소리가 들리는 산에 올라 나무에 밧줄을 걸고, 목에 매듭을 걸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싫어, 그의 머릿속에 흰 거품을 입에 문 우스꽝스럽고 흉측한 시체가 떠올랐고, 그는 그 자리에 누워 담배 한 대를 피우고선 집으로 돌아갔다. 아내는 그의 목에 그어진 밧줄 자국을 바라보다가, 살아왔으니 된 거야, 그의 등을 쓸어 주었다.





 손님은 두 시간 넘게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데, 요리는 멈추지 않는다. 세 시간 뒤 해가 지면 공복의 서퍼들이 몰려드는 걸까, 내 안면 근육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채고 곱창 스튜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신메뉴 개발에 들어간 걸까. 머리 위로 이제 막 체크인을 한 옆 방 게스트가 짐을 정리하고 욕실로 걸어갔다. 고개를 들면 그의 발소리가 보였다. 화장실 갈 때 조심해야겠구나. 이걸로 15장째. 에노시마 섬, 가마쿠라 대불, 하이데라의 동굴, 만화 <슬램덩크>의 배경이었던 장소들, 과연 다 가 볼 수 있을까? 해는 졌고, 서퍼들은 오지 않는다. 나는 노트북을 덮고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 바닷가에나 나가 볼 요량이었다. 네 시간째 요리는 계속되었건만, 샌드위치는 주문이 들어간 뒤에야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1938년 다자이는 두 번째 결혼을 올리고 도쿄 인근 무사시노 시 미타카로 이사했다. 생활은 안정을 찾았고, 문단의 명성도 높아졌다. 1947년 <사양>이 발표되자 사양족이라는 신드롬이 생겨났고, 이듬해엔 그의 대표작 <인간실격>이 출간되었다. 다자이는 내친김에 <굿바이>를 아사히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몸이 거기까지였다.

 해가 진 바다에 네 명의 서퍼가 남아 파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드 헤드를 검은 바다를 향해 치켜들고, 작은 파도는 둥실 떠올라 흘려보내며, 막연하게, 자기의 파도를 기다렸다. 제법 큰 파도가 밀려 왔고, 두 사람이 파도에 올라탔다. 크든, 작든, 각자의 균형감으로 버텨낼 수 있는 파도에 발을 디뎌야 하는 거겠지, 한 명이 얼마 못 가 균형을 잃고서 옆으로 몸을 던졌고, 한 명은 파도의 마지막 높이까지 꼿꼿이 밟고 서서 해변에 닿았다. 그는 수트 상의의 지퍼를 내리고 발목에 찼던 리쉬 코드 줄을 푼 다음, 보드를 옆구리에 끼고 스쿠터로 걸어갔다. 스쿠터 옆에 보드를 걸고 안장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그가 바라보는 검은 바다 위엔 세 명의 서퍼가 보드 위에 앉아 자신의 파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1948년 6월 13일. 다자이는 아내에게 유서를 남겼다. “신세가 많았습니다.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당신이 싫어져서 죽는 게 아니라, 소설 쓰는 일이 싫어져 죽습니다.” 다자이는 새 애인 야마자키 부에이와 강물에 몸을 던졌다. 다자이의 시체는 그의 39번째 생일이 될 뻔했던 6월 19일 떠올랐다. 기모노 끈으로 부에이와 한 데 묶인 모습이었다. 완전한 안녕이란 없다는 듯, 삶에는 늘 미진한 이별뿐이라는 듯, 자신이 올라타 딛고 설 파도가 거기까지였다는 듯, 소설 <굿바이>는 완결지어지지 못한 채 그의 책상 위에 반듯이 놓여 있었다.



 방안에선 전차 소리만 들릴 뿐 파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내일은 에노시마 섬에나 가볼까, 지도를 펴고 누웠을 때 몸에 진동이 느껴졌다. 지진이구나, 창을 조금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집이 조금 흔들릴 뿐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도, 어딘가로 달려가는 사람도,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사람도 없었다. 조금 흔들리긴 했어도, 이게 자신들이 딛고 선 땅이라는 건가, 올라탄 파도라는 건가. 그게 어떤 모습이든 자신의 파도라 생각하면 올라타 균형을 잡고 해변으로 밀려가면 그만이라는 건가. 나의 파도는 아닌지 모르지만, 그럼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건가?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워 지도를 펼쳐 들었다. 진동은 사라지고 없었다.





글/사진 이주호

여행 매거진 브릭스BRICKS의 편집장.
여행을 빌미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최근에 에세이 <도쿄적 일상>을 냈다.
그의 <도쿄적 일상>이 궁금하다면.
http://www.yes24.com/24/goods/30232759?scode=032&OzSrank=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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