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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Nov 23. 2016

네팔, 히말라야 민트

롯지는 카페가 되기도, 식당이 되기도, 여관이 되기도 한다

여행 매거진 BRICKS Trip - 카페 미야 #5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 Part I


 떠나기 전날 밤 비는 세차게 내리쳤다. 물은 무섭게 불어나 내 발에 신겨 있던 슬리퍼를 쓸어가 버렸다. 그런데도 숙소 주인은 산을 타는 건 문제없을 거라고 말한다. 벼락까지 내리치는 바람에 숙소는 정전이 되었고, 어둠 속에서 침대 아래로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던 쥐의 꼬리를 목격했다. 머리끝까지 모포를 뒤집어쓰고 시큰한 콧날을 몇 번이고 쥐었다.

 다음 날 아침. 길바닥은 거짓말처럼 바싹 말라 있었고, 마차푸차레가 포카라 페와 호수 뒤의 허공을 날카롭게 가르고 있었다. 나의 루트는 나야풀에서 시작하여 티케퉁가, 울레리, 고레파니를 거쳐 해발 3,210m의 푼힐 전망대에서 일출을 맞이하며 히말라야 파노라마를 조망한 후 타다파니와 간드룩을 지나 다시 나야풀로 내려오는 4일간의 일정이었다. 히말라야 트레킹 일정은 본인이 선택하기에 따라 짧게는 3일, 길게는 해발 4,130m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ABC)까지 밟고 오는 9일 산행도 가능하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유유자적할 수밖에 없는 산행이다. 고산증에 주의해야 하니 아무리 체력이 좋다 해도 하루에 고도 800m 이상은 오르지 않는 것이 좋다. 하루 평균 4~5시간 정도 걸으면 적당하다. 첩첩산중에도 마을과 롯지가 있어 음식 걱정, 숙소 걱정 없으니 배낭도 가벼울 수밖에. 산골 사람들의 소박한 삶을 구경하고, 산에 흠뻑 취해 걷다 보면 이곳에서 한 달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나야풀 관리사무소에서 입산허가증Permit을 체크하면 산행이 시작된다. 산행자의 입산 여정을 기록하는 공책은 손때가 묻어 너덜너덜하다. 빽빽한 이름 아래로 나의 신상정보와 입산 여정을 기록하니 벌써 뿌듯하다. 오늘 출발한 사람은 15명, 그중 한국인 2명이 ABC를 향했다. 과연 만날 수 있을까?





 히말라야 트레킹을 할 때는 길을 잃지 않도록 가이드나 포터를 고용하게 되는데, 말할 것도 없이,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가 앞으로의 산행을 좌우한다. 나의 포터 바랏은 조용한 편이었다. 구간의 특성마다 주의해야 할 사항을 간단히 알려주고, 잘 걷는 편이라고 종종 칭찬도 해줬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기에 가장 좋은 때는 10~11월이다. 낮에는 걷기에 쾌적하고, 하늘이 맑아 설산 파노라마와 은하수를 볼 수 있다. 6~9월은 습도가 높고 비가 많이 쏟아져 길이 유실되기 쉽고, 밤낮으로 구름이 내려앉아 파노라마도 별도 보기 힘들다.



 내가 산행을 하던 때는 7월, 몬순의 한가운데였다. 세차게 내린 비로 나무가 뽑혀나가고 무너진 돌덩이가 길을 막기도 해서 에둘러 가는 일이 많았다. 물이 차오른 아찔한 철제 다리 위를 흔들흔들 걷기도 하고, 물살에 휩쓸리지 않도록 한 걸음씩 살펴 디뎌야 했다. 젖은 내리막길은 미끄러지지 않게 발에 힘을 꾹 주고 걸어야 하다 보니 평소보다 힘든 산행이 되고 있다. 바랏은 나의 페이스에 따라 적당히 완급 조절을 하며 롯지에서 쉬어가곤 한다. 롯지는 들르는 시간에 따라 카페가 되기도, 식당이 되기도, 여관이 되기도 한다. 마당 한쪽 허름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산속 풍경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 즐거움은 그 어떤 으리으리한 카페와도 비교할 수가 없다.


 16만 원 거금을 주고 산 경등산화가 드디어 진가를 발휘한다. 시냇물을 헤쳐가도 물 한 방울 스며들지 않는다. 탁월한 선택에 의기양양해 하다 문득 바랏의 신발을 바라보았다. 매일 히말라야 산을 오르는 게 업인 바랏의 발에는 구멍을 몇 번이나 기운 너덜너덜한 운동화가 신겨 있다. 아, 이런.

 저만치 앞에 볏짚 더미가 뒤뚱뒤뚱 움직이는가 싶더니, 더미 아래로 불쑥 발목이 삐져나온다. 더미가 너무 커 이고 가는 아이의 가늘고 얇은 발목만 보인 것이다. 아이의 까만 발에는 다 헤진 슬리퍼가 신겨 있다. 아이에 비해 거의 맨 몸이다 싶은 나는 헉헉대는 숨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아이를 지나친다. 아이가 싱긋 웃는다. 새카만 눈망울이 반짝. 아, 이런, 나의 신발.



 자기 등보다 더 큰 가방을 지고 가는 여자아이가 보인다. 무거운 가방도, 거친 산길도 아이의 패션 센스를 누르지는 못한다. 앙증맞은 분홍색 샌들. 히말라야 멋쟁이의 할아버지가 쉬어가자고 털썩 주저앉는다. 아이는 커다란 가방에서 커다란 물통을 꺼내 뚜껑을 열고 할아버지에게 내민다. 별다른 말없이 물통을 주고받는 손길, 아, 이런, 저 끈끈함이란. 포터에 등산화에, 나의 의기양양함은 대체 뭐였을까.




 땀이 식어 금세 몸이 추워지면 따뜻한 차가 그리워진다. 오후 네 시, 산행을 마치고 롯지에 들러 민트 차를 주문한다. 인도 막장 드라마 삼매경에 빠진 주인아주머니가 유리컵에 뜨거운 물만 가득 따라 내준다. 뭐 하자는 거지? 그러더니 나를 내버려 두고 텃밭으로 나간다. 빗방울 통통 튀던 민트 잎을 무심히 똑, 똑 딴다. 민트 잎이 내 유리잔 아래로 찬찬히 가라앉고, 아주머니는 다시 드라마에 빠져든다. 어느 집 부엌에선가 밥 짓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구름이 눈앞의 산을 쓱싹, 말끔히 지워버렸다. 오늘 밤도 은하수 보기는 글렀다. 곧이어 양동이로 들이붓듯 비가 쏟아진다. 먼발치 아래에서 번개가 친다. 푼힐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선명한 안나푸르나를 맞이할 수 있을까? 집을 수 있을 만큼 식은 유리컵에 담긴 연녹색 물을 한 모금 마신다. 아, 이 무심함이란, 온몸이 훈훈해진다.



Part II로 계속.




글/사진 miya

런던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옥스퍼드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지금은 서울 체류자. 대륙을 가리지 않고 오지를 휘젓고 다녔지만, 이제는 카페에 나른하게 앉아 일기를 쓰고 엽서를 쓴다. 창밖을 바라보는 맛이 더욱 좋아져 걷기도 싫어져 버린. 아니, 아니, 나이 때문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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