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ggie chae Sep 19. 2024

감춰진 통로

기억에 잠든 자

우리는 계속해서 숲을 헤치고 나아갔다. 나뭇가지가 바스락거릴 때마다 오돌토돌한 소름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걸음은 무거워지고, 조심스러워졌다. 이 숲 전체가 우리를 저지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론가 이끌려 가는 듯한 느낌이 더 강해졌지만, 그 방향이 올바른 지 전혀 확신할 수 없었다.


"우리가…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


불멧돼지가 갑작스레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불안과 의심으로 뒤섞여 있었고, 나 역시 같은 감정을 느꼈다.

나는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 이름이 다시 기억될 때 구원이 있으리라…"


이 말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맴돌았다. 마치 우리가 이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이 숲에서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경고처럼. 그러나 그 이름이 무엇인지, 어떻게 구원과 연결되어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불멧돼지는 눈을 감고 그 말을 되뇌는 듯했다. 그의 얼굴은 혼란과 무거운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 이름…"


그가 다시 입을 뗐다.


"우리가 알아야 할 그 이름이… 대체 뭘까?"


나도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나뭇가지들 사이를 살폈다. 이 숲은 그저 어두운 나무들과 썩어가는 냄새로 가득한 곳이 아니었다. 이곳은 우리가 잊으려 했던 것, 도망치려 했던 것들을 숨기고 있는 장소였다. 그리고 그 숨겨진 것의 중심에 '이름'이 있는 듯했다.


그때, 사방에서 들리는 나뭇가지 흔들림과 작은 바람 소리들이 귀를 간질였고, 숲이 살아 있는 듯 느껴지기 시작했다. 경계에 서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섬뜩했다.


"뭔가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어."


불멧돼지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숲은 마치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우리를 주시하는 공간 같았다. 그러나 그 '누군가'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불멧돼지와 나, 우리 둘만이 이 숲에 갇힌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곳에 감춰진 다른 이들이 있는 것일까?


"이 숲에는 우리가 모르는 이들이 더 있는 걸까?"


내 속삭임은 숲 속 깊은 어둠에 흡수되듯 사라졌다. 불멧돼지는 말없이 주변을 살피며 긴장된 표정으로 내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숲의 기운이 달라졌다.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이 숲 속에서, 보이지 않는 발걸음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우리 말고도 누군가가 있다는 섬뜩한 기분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들이 우리를 보고 있을까, 아니면 우리와 같은 길을 잃은 이들일까?


그 순간, 불멧돼지가 입을 떼었다.


"우리가 찾는 그 이름…"


그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 그것은 우리가 기억하기 싫었던 것이겠지."


그의 말에 나는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을 억누를 수 없었다. 오래전부터 잊고 있던 문장,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남아 있던 단어들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기억에 잠든 자여, 네 이름은 어디에 숨었는가."


내가 조용히 읊조리자, 불멧돼지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뜻이야? 그게 무슨…"


나는 그의 말을 끊고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둠이 삼킨 그 이름은, 다시 태어나리라."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불멧돼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우리가 잊으려 했던 이름이… 여기에 묻혀 있는 게 확실해."


그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확신이 나를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우리는 그 이름을 기억해야만 했다. 그것이 우리가 이곳에서 빠져나갈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기도 했다.


그때, 무언가 우리의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숨소리가 분명했다. 뭔가, 아니 누군가 바로 우리 뒤에 서 있었다. 불멧돼지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며 뒤를 돌아봤을 때,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누군가 있어…"


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공기 속을 가르며 어둠 속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고, 그 순간 우리의 시야 속에 존재가 드러났다. 그것은… 낯익은 얼굴이었다.



이전 06화 비밀의 조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