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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ggie chae Sep 17. 2024

비밀의 조각

슬퍼하는 자 복이 있나니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불멧돼지도 놀란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달빛 아래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다른 누군가가 있어요."


불멧돼지가 낮게 속삭이며 긴장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숨소리가 점점 더 급해지고 있었고, 손끝까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도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달빛이 비치는 길 끝에 어딘가 불길하게 꿈틀거리는 그림자가 있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 존재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너희는 왜 여기에 왔지?"


낯선 목소리에 놀라 숨을 멈췄다.


"대답해, 왜 이곳에 왔느냐고 묻고 있어."


어둠 속에서 그 목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졌다. 나는 입을 열지 못한 채 불멧돼지를 바라보았다.


"우리도 잘 모르겠어요… 여기에 어떻게 왔는지도…."


불멧돼지가 낮게 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당혹감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그 순간, 마치 잊었던 것이 떠오르는 듯한 느낌처럼 나는 우연히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니, 우리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잃어버린 것을 찾으러 왔어요."


나의 말이 끝나자, 어둠 속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이번엔 훨씬 더 가까이에서.


"잃어버린 것? 네가 그토록 잊으려 했던 그 이름 일지도 모르겠군."


그의 말이 내게 닿는 순간, 잊혔던 시의 한 구절이 불현듯 떠올랐다.


달빛은 상처를 드러내리.
어둠 속에 갇힌 빛 아래,
우리는 죽은 그 이름을 부르리라.


낯선 목소리의 주인은 오래된 나의 시 속에서 언급된 '그 이름'과 연결된 존재 같았다.


"죽은 그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아."


그의 말이 내 귀를 파고들자, 차가운 공포가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몸 전체가 얼음장에 묶인 듯, 숨을 내쉴 틈조차 없었다.


"너희가 지나온 길, 그곳에서 너희가 잃어버린 감정과 고통이 묻은 잔해들이 되살아나 이곳에서 너희를 기다리고 있어."


그때, 어둠 속에서 들려오던 목소리의 주인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다가올수록 주변 공기가 점점 더 무거워졌고, 그의 형체가 달빛에 잠식되듯 흐릿하게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눈빛만은 날카로웠다. 그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그가 인간 이상의 존재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어."


차가운 물이 스치고 지나가는 듯 서늘한 감각이 내 안을 파고들었다. 그 이름이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결코 지울 수 없는 흔적임을 깨닫는 순간, 나를 둘러싼 어둠이 더욱 짙어졌다.


불멧돼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은… 그 이름과 어떤 관계가 있죠?"


그 남자는 말없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상처가 드러나 있었고, 그 상처는 우리를 심판하려는 듯한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었다.


"나는 모든 이들의 어두운 흔적들을 모으고 있어. 너희가 무참하게 버리고 떠난 순간의 조각들 마저도… 그리고 너희 앞에 다시 나타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지."


그가 우릴 향해 내민 흐릿한 조각의 일부에서 오랜 시간 감춰왔던 상처와 기억들이 소용돌이치듯 나타났다.





그 낯선 물체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안에는 잊힌 이름들, 깨진 시간들이 미묘하게 엉켜 있었다. 희미한 빛이 잔잔히 흘렀지만, 고통과 상처도 서서히 드러났다. 앞서 본 어둠의 그림자가 전해준 고통이 다시금 우리 앞에 부유하는 것 같았다.


불멧돼지도 그 조각을 응시하더니, 힘겹게 고개를 숙였다. 그 조각들 속에 담긴 것이 그에게 얼마나 무거운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건…"


불멧돼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내가 가장 숨기고 싶었던 기억이야."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그가 애써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살아났다. 그 조각은 그의 가장 깊은 고통을 다시 불러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옆에서 그가 응시한 조각들에 담긴 기억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깨지고 무너져가는 장면들이 떠올라 있었다. 상처받은 자신을 애써 감추려는 모습, 그리고 상처를 피하려 했던 그의 고통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이 고통을 다시 마주하기 위함일까?."


불멧돼지가 차갑게 속삭였지만, 그의 눈빛은 참을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 이름이 다시 기억될 때 구원이 있으리라."


먼 달빛으로부터 지복(至福)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의 손에 든 조각들이 모두 맞춰질 때, 우리가 찾아야 할 잃어버린 진실이 드러날 것임을. 또한 그 진실은 흘러간 과거의 상처가 아니라, 감춰진 통로의 시작이라는 것을.


‘그 이름’을 부를 때, 숨겨진 통로가 우리 앞에 열릴 것이다. 어둠 깊은 곳의 그 길이 아픈 흔적을 마주해야만 드러나게 될지라도 어둠이 우리를 완전히 삼켜버리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 길을 찾아야만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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