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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ggie chae Aug 29. 2024

프롤로그: 문이 열릴 때마다

시작된 불안

서울의 밤은 차가운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도시의 불빛이 한강 위로 희미하게 반사되고, 바람이 스칠 때마다 물결 아래에 깊이 잠든 무언가가 서서히 깨어나는 듯했다. 오늘도 나는 익숙한 길을 따라 책방으로 향했다. 그곳은 나의 피난처이자 동시에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장소였다. 문이 열릴 때마다 내 안에 묻어둔 오래된 기억들이 깊은 곳에서 꿈틀대며 깨어나는 것만 같았다.


문을 열자 익숙한 초콜릿 향이 나를 감쌌다. 기분 좋은 향에 잠시 안도했지만, 다가올 무언가를 예감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보았다. 흰 고양이—모두가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오늘도 흰 셔츠를 입은 그녀는 고양이처럼 조용하고 우아했다. 움직임 하나 없이 앉아 있었지만, 주변의 모든 것을 예리하게 살피는 눈빛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이 책방의 어둠 속에서 은밀하고 하얀빛으로 우리를 응시하는 듯했다.


“오늘도 왔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오래된 나무의 속삭임처럼 낮고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내 안의 불안을 조용히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이 보이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문은 열리기 전까지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한 번 열리면 그 선택에 얽매이게 된다. 열린 문 뒤에는 되돌릴 수 없는 과거가 있고, 다시 돌아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이 문을 열어젖힌다. 사람은 끊임없이 새로운 문을 열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문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더 깊은 어둠이 도사리고 있을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때 문이 다시 열렸다. 차가운 바람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오늘 밤은 평소와 다를 것이라는 것을.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불멧돼지였다. 거칠고 강인한 외모. 그러나 그 속에는 지우지 못한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자신을 멧돼지처럼 고집스럽게 밀어붙이는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그 고집 속에는 끝없이 아물지 않는 상처가 있었다. 그가 나를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나는 그의 말을 잠시 곱씹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나는 살짝 미소 지었다. “여기서 다시 만날 줄은 몰랐어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무겁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는 말하지 않은 진실들이 엉켜 있었다. 이 책방은 그가 감추려 했던 진실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이 책방, 뭔가 있죠?” 그가 조용히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그를 바라보았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책방은 우리가 숨기려 했던 것을 끌어내는 무언가가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실로 묶여 있는 것처럼, 느리고도 확실하게 우리를 그 끝으로 이끌고 있었다.


“당신도 알고 있죠?” 내가 되물었다.


그는 잠시 책방의 어딘가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깊고 고요했다.


“모르겠어요,” 그가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피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의 목소리 속에서 무거운 감정이 느껴졌다. 그가 짊어진 상처와 불안이 내게도 스며드는 듯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이유로 이곳에 왔지만, 결국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이제 당신 차례예요,” 그가 다시 말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결의가 담겨 있었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이 책방의 문이 열릴 때마다 비밀은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피할 순 없겠죠,” 나는 말했다.


내 안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문이 열릴 때마다 진실에 조금씩 더 가까워질 것이다. 그 진실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아무도 모른 채, 마치 모비 딕의 사냥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항해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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