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벌써 지난 해가 되어버린 2020년 어느날,
“엄마! 나 여덟 살 되려면 몇 밤 자야해?”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기대에 찬 아이가 묻는다. 새로 다닌 태권도장에서 만난 초등학교 형아들이 그렇게 멋있다며, 자기도 빨리 그 형아들처럼 초등학생이 되어 검은띠도 따고 우렁차게 구호도 외치고 싶단다.
“준아, 그렇게 빨리 크고 싶어?”
“응! 빨리 시간이 지나서 형아가 됐으면 좋겠어!”
아이가 환하게 웃자 세상도 덩달아 밝아진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시간이 빠르게 흘러도 좋겠다, 맞장구를 쳐주지만 마음 한 켠이 조금 쓸쓸한 건 어쩔 수가 없다.
일생에서 부모님께 하는 효도는 일곱 살까지라고 하던가. 어느 현자가 그런 말을 남겼는지, 사실 하루 하루 지나가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다. 노오란 유치원 차 앉에서 아낌없이 날려주는 하트, 잘 때 옆에 있어달라고 하는 귀여운 투정부터 아직은 오밀조밀한 손과 발, 그리고 문득 문득 비치는 아기 때 얼굴, 까마득한 눈동자…장난꾸러기이지만 애교가 넘치는 아이를 볼 때마다 이 모습과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다는, 그래서 시간이 천천히 흘러주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고개를 든다.
사실 엄마가 되기 전 나 또한 누구보다 빠르게 시간이 흘러가길 바랐다. 마음은 늘상 현재보다 몇 계절 앞서나가곤 했다. 그래서인지 가을이 좋았다. 가을은 곧 찾아올 새해를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12년 제도권 교육의 잔재인지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만 하는 봄날은 그저 피곤했고, 찌는 듯한 무더위속 맹렬히 돌아가는 에어컨의 계절 또한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다 툭, 선선한 바람이 볼을 치고 지나가는 가을이 되면 아, 이제 올해도 다 갔구나 하는 생각에 오히려 설레기 시작했다. 멋진 야경을 배경삼아 누군가와 손잡고 걷기 좋은 청량한 가을밤은 덤이었으리라. 그러고 나면 온 세상이 축제인 크리스마스가 찾아왔고 그렇게 한 해를 개운하게 흘러보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삶에서 계절은 내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일년 내내 25도인 계절. 신생아와 함께 하는 새로운 법칙이었다. 열 달 품은 아기를 처음 만난 계절은 초록잎이 무성한 여름이었지만 삼복더위에 행여 땀띠라도 생길까, 에어컨 바람에 감기라도 걸릴까 온 세상의 온도는 아기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더 이상 바깥 세상의 계절에는 관심이 없었다. 폭염이거나 폭설이 내리더라도 그저 실내 온도는 일정해야 한다는 점, 그래서 아기가 감기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는 점. 그렇게 우리만의 새로운 계절을 시작했다.
몇 번의 계절을 보내고 나니 이제 제법 자란 아이가 옆에 있다. 알을 깨고 나온 새가 세상을 궁금해하듯 사방을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아이는 나무 한 그루를 보고도 벡만가지의 질문을 쏟아낸다.
“엄마!! 저 나무가 왜 발가벗었어?!! “
“엄마!! 나뭇잎에 왜 빨간색 노란색으로 변해??”
또렷하게 변하는 계절의 흐름을 아이도 이제 알기 시작한 걸까? 유치원에서 영어로 배운 사계절을 ‘쓰쁘리이잉~써머, 풜, 윈터~’로 복기하며 제법 혀꼬부라진 소리를 내더니 이제는 엄마가 좋아하는 계절을 묻기까지 한다.
"엄마는 무슨 계절이 제일 좋아? 난 여름이 좋아!”
“그래? 여름이면 우리 준이가 태어난 계절이네”
“응응 여름에는 내가 좋아하는 수박도 먹고 참외도 먹고 물놀이도 하고! 나는 여름이 제일~~~~~~좋아”
앞으로도 아이는 계절이 달라질 때마다 내게 질문을 쏟아부을 것이다. 아직은 막힘없이 술술 답해줄 수 있어 다행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질문과 대답이 오가지 않는 시간도 분명 찾아오겠지. 춥지 않게 덥지 않게 그저 무심한 채 바삐 오가는, 훌쩍 큰 아이 옆에 옷 가지 몇 벌을 챙겨주는 것으로 나는 마음을 표현할 지 모르겠다. 사춘기 지랄 총량의 법칙을 피해갈수 있을까 어쩌면 외롭고 적적할 것 같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렇게 말해주련다. 나의 계절이 가고 우리의 계절이 찾아왔듯, 이제 너만의 계절이 시작할 것이라고. 그리고 엄마는 언제나 너의 계절을 좋아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