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7월 18일 오후 9시 30분
아들이 1학기 수업이 마무리되고 방학이 다가와 체험수업으로 영화를 보러 다녀왔다고 했다.
무슨 영화를 봤냐 했더니 「킹 오브 킹스」를 봤단다. 전혀 모르는 영화다.
자아, 오늘은 영화 이야기로 시작해 볼까?
* 이번 포스팅에는 영화 「트루먼 쇼」, 「매트릭스」의 결말에 관한 스포일러가 일부 담겨 있습니다.
나 : 오늘 본 킹 오브 킹스, 어떤 영화야? 제목만 들으면 뭔가 장엄한데.
아들 : 예수님 생애를 다룬 아동용 애니메이션이에요. 근데 단순히 이야기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어린아이의 시선에서 예수님의 삶을 바라보도록 꾸민 작품이에요.
나 : 애니메이션이구나.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많이 나오니?
아들 : 네. 마구간에서의 탄생부터, 왕들의 탄압, 바리새인들의 비난, 믿는 사람들이 나중에 배신하는 장면까지 그대로 나와요. 그리고 십자가형과 부활도 다루죠. 다만 그 과정을 아이의 시선으로 묘사해요.
나 : 옆에서 보는 아이가 실제로 나와?
아들 : 네. 아버지가 이야기를 해주는데, 영화에선 아들이 실제로 거기에 같이 있으면서 보는 것으로 보여주더라고요.
이 영화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 「우리 주님의 생애를」 모티브로 만든 3D 애니메이션이다. 디킨스가 아들 윌터에게 예수의 삶을 들려주는데, 그 아이가 실제 장면 속에 함께 있는 듯 연출된다.
나 : 그럼 아버지가 예수를 직접 본 거야?
아들 : 아니에요. 아버지도 전해 들은 걸 아이한테 말해주는 거예요.
나 : 아, 아버지도 아들도 실제로 예수님을 진짜로 봤던 사람들은 아니었구나.
( 아버지가 예수의 제자 혹은 동시대 사람인가 했지만 알고 보니 원작자인 찰스 디킨스였다. 나름 큰 오해였다. )
나: 그런데 불교나 무교인 애들은 좀 불편했을 수도 있겠다.
아들: 맞아요. 재미없어하는 친구들이 있었어요. 그냥 투덜거리며 보긴 했죠.
나: 그럼 추천할 만한 영화는 아니라고 봐야겠네.
아들: 맞아요. 명작도 아니고 망작도 아니고. 저처럼 성당 다니면 볼만한 영화였어요. 메시지는 뚜렷했지만 퀄리티는 잘 모르겠어요.
( 성서 내용을 그대로 표현한 영화 중에서는 크게 흥행한 영화였다는데 그래도 종교 영화는 이렇게 평가가 엇갈릴 수밖에 없구나. 그래서 벤허나 쿼바디스 같은 영화가 정말 대단한 거겠지. )
( 하지만 저 명작들을 아들에게 추천하기에는 너무 옛날 영화이긴 하다. 고1 때 아버지가 꼭 읽어야 하는 명작이라 추천해 주신 A.J. 크로닌의 「성채」 읽기 다섯 번 을 실패했던 내가 아들에게 명작 추천이라니. )
나 : 성당과 관련된 영화 중에 기억나는 거 있어?
아들 : 네. 트루먼 쇼요. 2~3년 전에 봤어요.
( 종교영화를 물은 거였는데 트루먼 쇼라니, 그것도 성당에서 트루먼 쇼를 보여줬다고? )
나 : 오호, 어떤 장면이 기억나?
아들 : “굿 애프터눈, 굿 이브닝, 그리고 굿나잇”이라고 인사하는 장면이요. 주인공 삶이 거대한 세트장에서 촬영되는 가짜였다는 게 충격적이었어요. 결국 스튜디오 만든 사람과 마주한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장면도 기억나요.
나 : 그럼 트루먼의 삶은 가짜였다고 생각해?
아들 : 꼭 그렇진 않다고 봐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비록 배우였지만, 같이 살아준 건 사실이잖아요. 들키지 않았다면 그냥 진짜라고 믿고 행복하게 살았을 거예요.
나 : 아빠는 어릴 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사실 세트장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해 본 적 있어. 내 주변 사람들이 다 배우일 수도 있다고. 너는 그런 생각 안 해봤어?
아들 : 아니요. 전 그런 생각해본 적 없어요.
나 : 만약 네가 트루먼이라면, 그 세트장을 벗어날래? 아니면 그냥 남아 있을래?
아들 : 저는 나갈 것 같아요. 힘들더라도 진짜가 어떤지 궁금하니까요.
나 : 용감하네. 아빠라면 못 나갔을 거야. 그동안의 모든 게 가짜였다면 너무 무서울 테니까.
아들 : 그리고 가짜 세상이라면 내가 누리던 모든 것이 언젠가 사라져 버릴 테죠.
( 하지만 진짜 세상에서도 내가 가진 것, 누린 것 모두가 한순간에 다 사라질 수도 있지. 그렇다면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인 걸까. 순간 혼란스러워졌다. )
나: 매트릭스라는 SF 영화 알아?
아들: 네, 들어본 적 있어요.
나: 거기서 주인공이 세계의 진실을 알고 싶으면 빨간 약, 지금처럼 살고 싶으면 파란 약을 먹는 선택을 하는 장면이 있어. 빨간 약을 골랐는데, 알게 된 바깥 세계는 지옥이었지. 인공지능에게 지배당한 끔찍한 현실이었어.
아들: 듣기만 해도 무섭네요.
나 : 그러니까 진실을 아는 게 꼭 행복은 아니란 거야. 그래서 네가 “밖으로 나가겠다”라고 쉽게 말했을 때 아빠가 좀 놀랐어. 그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선택이거든.
아들 : 그래도 전 나갈 것 같아요. 진짜를 직접 보고 싶으니까요.
( 아들은 주저 없이 ‘진짜’를 택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파란약을 잡을 것이다. )
( 아들의 선택을 존중하지만 부모는 자녀들에게 파란약을 권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걸까. )
나 : 그래. 용감하네. 어쩌면 네 선택이 옳을 수도 있겠지.
오늘은 내가 아들에게 상담을 받은 것일까?
아들 앞의 세상은 아직 ‘궁금한 것들’로 가득 차 있고
나의 세상은 ‘지금이 가장 안전하다’는 이유로 멈춰 서 움직이지 않지.
아들은 진짜를 향해 나가겠다고 했다.
그게 진짜일지 가짜일지 누구도 알 수 없는 거지만
적어도 오늘 밤은 빨간 약을 함께 먹는 꿈을 꿀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