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과학이 너무 싫다니, 대화가 너무 힘들다

25년 7월 19일 저녁 10시 10분

by 마법수달

"아들, 이제 오늘 10분 이야기해야지."


"잠깐만요, 지금 궤도 보는 중이라 이 영상 끝나면 아빠한테 갈게요."


오, 궤도를 챙겨본다 → 과학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 궤도는 과학채널 안될과학의 멤버로 활동 중인 과학 유튜버이다. 우리가 아는 '인공위성 궤도'의 그 궤도가 맞다. )


좋았어! 오늘은 과학 이야기로 가자! 그리고 과학 공부 이야기로 더 가자!


마음속으로 꽤 기대하는 시나리오였다.


그래, 적어도 대화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말이지.




< 어떻게 지평좌표계로 고정하셨죠? >


나 : 궤도가 과학 유튜버인 거 알고 있어? 본 것 중에 어떤 게 기억나?


아들 : 미미미누라는 유튜버랑 콜라보해서 술 마시며 토크하는 거 본 적 있어요.


나 : 술 마시면서 토크? 그러면 과학 이야기한 건 본 적이 없어?


아들: 아, 외계 지성체에 관한 내용을 본 거 같아요.


"외계인은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그 증거는 바로 우주에 존재하는 유일한 지적생명체, 바로 우리 인간이다."


나 : 외계의 지성체? 우주 저 너머에 외계인이 있다 이런 거?


아들: 네. 그리고, 궤도가 침착맨이랑 같이 방송도 하거든요. "어? 지박령이다!" 그러면 "어떻게 지평좌표계로 고정하셨죠?" 그런 대사도 있어요.


한국 귀신이 타이밍을 못 맞추면 아르헨티나로 강제 이주 된다 (출처 : 뉴스엔)


< 나는 과학이 싫어요 >


나 : 사실 궤도가 말하는 내용들이 쉬운 내용이 아니지.


아들 : 과학을 몰라도 재미있어요. 궤도가 재미있어요.


나 : 과학 이야기는 원래 어려운데 궤도는 왜 재미있을까? 쉽게 이야기해서? 아니면 네가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거야?


아들 : 다른 과학은 다 재미없는데 궤도만 재밌어요.


나: 다른 과학은 다 재미없어?


아들 : 과학책은 진짜 너무 싫어요.


나 : 책이 싫다?


아들 : 과학책만 싫은 게 아니라 그냥 과학이 다 싫어요.


( 어, 뭐지? 고민도 없이 바로 싫다? 과학책도 싫고 과학도 싫다? )


나 : 과학이 왜 그렇게 싫어?


아들 : 그냥 싫어요. 시험 칠 때 외우는 거 때문에도 그래요.


나 : 그건 과학 시험이 문제인거지.


아들 : 과학은 전부 다 외워야 하잖아요. 수학이나 국어도 외워야 되긴 하지만 그래도 개념이 쉽잖아요.


나 : 사실은 수학을 배우는 이유는 과학 때문이거든. 원래 수학은 과학을 위해서 공부하는 거야.


아들 : 그럼 둘 다 안 하면 되죠.


( 왜 저렇게 극단적으로 말하는 거지? 머리가 멍해지고 입이 떨려서 말이 안 나오기 시작했다. )


좋은 말할 때 과학 좋아해라 VS 아 글쎄 과학 너무 싫다니까요 (Grok 생성)


나 : 그렇게는 살 수 없어. 네가 앞으로 어떻게 살더라도 수학, 과학 없이 살 수는 없어.


아들 : 그런데 수학, 과학 없이 사는 사람도 있잖아요.


나 : 넌 학교에서 시험 치는 과학 과목만 생각하지만, 사실 과학이란 학문의 범위는 매우 넓어.


아들 : 그래도 과학에 흥미가 없어 가지고 안 해요.


( 아, 제발. 목이 턱턱 막힌다. 과학이란 단어에 대한 반응이 생각보다 너무 격하다. )


< 과학 안 봐요 vs 과학 함 봐봐 >


나 : 사람은 왜 잠을 안 자면 힘들까, 키는 어떻게 하면 클까? 이런 것도 사실 다 과학이야.


아들 : 네네. 그런데 과학은 안 봐요.


나 : 네가 보지 않더라도, 사실은 우리 일상 속에 다 과학이 숨어 있는 거야.


아들 : 그래도 그냥 재미없는걸요?


나 : 하지만 고등학교에 가면 과학을 어쩔 수 없이 더 해야 해. 과학 시간이 힘들어?


아들 : 잘 기억 안 나요. 과학 시간에 맨날 수학 숙제해서요.


나 : 그러면 안 돼. 그래도 수업은 들어야 돼.


아들 : 원래 아는 내용도 있긴 해서 안 들어도 괜찮아요.


( 꼰대모드 ON. 최대한 대화하는 것처럼 최대한 잔소리를 해야 했다. )


나 : 그건 안다 모른다의 문제가 아니야. 싫다고만 하면 따라갈 수가 없어.


나 : 아빠도 예전에 과학을 진짜 힘들어했어. 하지만 안 할 수는 없었거든. 사실 아빠는 옛날에 과학자가 되려고 했어.


아들 :...


나 : 과학도 종류가 많으니까 네가 좋아하는 분야가 분명히 따로 있을 거야. 지금은 재미없다고 해도 나중에 달라질 수 있어. 궤도를 보길래 물어봤던 거야.


< 과학으로 주물러 줄게 >


( 둘 다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고 단정적인 말들이 오가다 보니 격하게 피곤이 밀려왔다. 심각한 표정에 하품이 연거푸 쏟아졌다. )


나 : 졸려? 졸아도 괜찮아.


아들 : 아뇨, 어깨가 아파서요.


나 : 어깨가 왜 아플까? 같은 곳에 힘을 계속 주면 피가 쌓이고 근육이 굳어. 그리고 이것도 다 과학이야.


( 그리고 아들의 어깨를 주무르며 과학을 시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라도 다시 분위기를 추스르고 과학에 대한 거부감을 조금이나마 녹이고 싶었다. )


잘 주물러 줄 테니 이제라도 과학을 좋아해 보는 건 어때? ( Grok 생성 )


나 : 그래서 과학이 이렇게 싫다는 말이 아빠에겐 조금 낯설게 느껴져. 너무 싫어하지는 마라. 지금은 재미없을 수 있지만.


아들 : 네.


나 : 아직은 중학교 1학년이니까. 재미없을 수도 있어. 근데 너무 싫다고만 하지 말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아들 : 네.




역대급으로 당황했다. 피곤이 몰려왔다.


대화가 이렇게 힘든 적이 없었고 그만두고 싶은 적이 없었다.


오늘 대화를 시작할 땐, 궤도를 계기로 과학의 재미를 함께 느껴보길 바랐다.


결과는 하아...


“과학은 그냥 다 싫다”는 아들의 단호한 반응은 충격 그 자체였다. 내가 준비한 이야기는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입가를 의미 없이 맴돌 뿐이었다.


과학이란 게 생활 속에 녹아 있고 알면 신기하고 재미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안타깝다.


하지만 아직은 중학교 1학년. 흥미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오늘은 그저, 아들이 싫다고 한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내가 아들의 궤도가 되기로. 과학포비아에 걸린 아들의 고개를 돌릴 우리 집 과학 인플루언서가 되기로.


나는 내일 서점에 과학책을 사러 간다.


올해 최고의 과학책이라길래 열심히 공부해서 알려주려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거 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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