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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향지 Mar 11. 2022

가지 않은 길은 알 수가 없다.

딸 둘 엄마의 요리 콤플렉스_제2장 자기위안적 선택

 큰 딸은 잘 웃고, 잘 놀고, 잘 자는 아이였다. 그런 큰 딸과 놀아주며 시어머니는 곧잘 노래를 부르듯 "엄마 아빠를 봐라! 엄마도 착하고, 아빠도 착하니 애도 순하지!"라고 흥얼흥얼 대셨다. 보는 사람들마다 "잘 웃는다! 순하겠다"이러는데, 그건 키우는 당사자인 나도 상당 부분 공감하는 터였다.


 게다가 아이 치고 꽤 조심스럽고 얌전했다. 문화센터를 가도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천방지축으로 돌아다니면서 엄마가 시종일관 같이 따라다니며 체력을 소모시키는 아이와는 차원이 달랐다. 어딜 가서도 한참을 관찰하고 나서야 행동했다. 비슷한 또래의 엄마들과 각자의 아이를 커피숍에 데려가서 문밖 로비에 풀어놓으면, 아이를 시종일관 주시하느라 수다에 참여하지 못하는 엄마들과 달랐다. 나는 먼발치서 아이를 주시하며 "주하는 멀리 가는 애 아니에요"라고 여유를 부리며, 자리에 끝까지 남아 남은 커피 한 방울까지 쪽쪽 빨아 마셨다. 아이는 내 주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무언가를 덥석 건드리지 않았다. 아이들이 놀면 기껏해야 다가가서 주위를 관찰하는 정도였다. 오히려 호기심 많은 아이가 손이라도 뻗을라치면 놀라서 울기 바빴다.


그러나  모든 부분에 양면성이 있다는 건 아이의 기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이는 신중한 대신 겁이 지나치게 많고, 새로운 걸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15개월 무렵, 집에 사둔 80cm 정도 높이의 유아용 미끄럼틀을 석 달 동안 관찰만 했다. 본인이 타고 싶어도 겁이 많아 탈 수가 없으니 자신의 애착 인형을 태우면서 대리만족을 했다. 돌이 되면 젖병을 떼고 빨대컵으로 우유를 먹여야 하는데,  아이는 빨대컵의 새로운 촉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18개월이 되자, 나는 더 이상 지켜보지 못하고, 애 앞에서 젖병을 자르는 충격요법을 쓰기까지 했다. 문화센터에서는 4회 정도가 지나서야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를 시작했다. 촉감놀이 시간엔 물감을 사방에 칠하거나 음식을 뭉개는 아이들을 공포스럽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 기질은 밥을 먹는데서 주효하게 작용했다. 미각은 둘째치고 촉각이나 시각적으로 낯선 음식이 들어오면 처음에 그냥 먹는 법이 없었다.


 이런 아이의 성향은 나와 정면충돌했다. 나는 무언가 똑같은 것을 반복하는 데 상당히 무료함을 느끼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해마다 돌아오는 반복적인 업무에 지쳐 비교적 안정적인 일자리를 박차고 나올 정도였으니까. 음식과 관련해서도 성향과 다를 바 없었다. 매끼 똑같은 메뉴를 먹는 건 공포에 가까웠다. 이러니 아이에게 주는 음식도 매끼 달라야 했다.


 게다가 대대로 전해온 우리집안의 식생활 상식은 아이의 자유로운 식생활을 방해했다. 너무 짜거나 너무 단 것을 금했다. 가공식품이나 사 먹는 음식도 되도록 자제했다. 어떤 저녁식사 시간엔 아이가 밥은 안먹고 치킨만 먹겠다고 고집을 부리길래 고집을 꺾으려 눈물 빠지게 혼냈다. 밥맛이 떨어질까 봐 아이가 졸라도 식전에는 비타민이나 사탕류도 잘 주지 않았다.


 성격상 목표에 대한 성취지향적 욕구가 강한 나는 아이가 기대치만큼 먹지 않는 걸 견디기 힘들어했다. 갖은 수단을 이용해서라도 내가 설정한 양만큼 먹여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인형을 갖다 놓고 역할극을 하면서 먹이기도 하고, 좋아하는 동영상을 보게 하며 혼을 빼앗은 다음 먹이기도 했고, 추후 군것질을 미끼로 먹이기도 하는 등 다양한 회유를 했다.


 아이가 그만 먹겠다고 할 때 "그래, 그만 먹어라!"라고 단번에 먹이기를 끝낸 적이 거의 없었다. 아이가 만족하는 양은 보통 터무니없을 때가 많았고, 어느 정도 먹였더라도 아이가 작다는 걸 우려해 나는 최대한 먹이는데 애썼다. 키 성장은 환경적 요인이 30%에 불과하니 밥을 억지로 먹이려다가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하는 육아 전문가의 말도 썩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그 30%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렇게 밥을 먹이다가 발생하는 문제가 더 클까?', '성향상 덩치가 작은 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더 클까?'를 질문해보면, 나의 답은 후자였다.


 가지 않은 길은 알 수가 없다. 아이는 한 가지 음식에 익숙해지기 전에 또 다른 음식을 접했는데, 만약 지속적으로 비슷한 음식을 줬으면 음식에 더 쉽게 적응할 수 있었을까? 소심한 아이에게 자기가 먹고 싶다는 걸 제한하지 않고, 맘껏 먹였으면 아이의 성격이 좀 더 자유로워졌을까? 매끼 한두 숟갈만 먹어도 그만 먹으라고 쿨하게 뒀다면 아이의 자기 주도성이나 자존감이 높아졌을까?


 나는 매끼 새로운 음식을 식판에 예쁘게 세팅하고, 가족이 공유하는 육아 밴드에 그것을 찍어서 올리는 것으로 아이를  먹이는데 따른 피로감을 해소했다. "엄마는 큰데 아이는 작다"는 사람들의 말은 '엄마가 제대로 못 먹이는 아니냐?' 것으로 들렸다. 동네 엄마들이 아이를 보자마자 내게 영양제를 추천해주거나 아이들이 잘 먹는 음식이나 그에 따른 레시피를 알려주는 고마운 오지랖에는 가슴이 쓰라렸다. 그러므로 성실하게 음식을 만들고 사진을 찍고, 먹이는 행위를 사진으로 찍어 공유하는 건 내가 아이를 먹이는데 소홀히 하지 않는 엄마임을 증명하는 나 나름의 변명이기도 했다. 나중에 커서 '나는 키가 왜 작냐'라고 하는 아이의 억울한 투정을 방어하기 위한 충분한 증거이기도 했다. 나는 어느덧 굉장히 방어적인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콤플렉스는 깊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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