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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준 Nov 20. 2023

나를 닮지 않은 너

오늘 밤에도 그녀와 망한 세상과 같은 8차선 도로를 산책하고 왔다. 아파트 단지 주변 개발이 아직 되지 않아 길만 닦아 놓고 가로등도 켜지 않는 깜깜한 폐허 같은 거리를 두고 디스토피아 영화를 좋아하는 그녀가 붙인 별명이다. 여기를 걸으면 힐링이 된단다.


또한 그녀에게 힐링은 아이들을 재워놓고 집안을 깨끗이 치우고 조명을 켜고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멍 때리는 것이다.


그녀와 나는 9년째 함께 살고 있다. 나는 결혼을 주변보다 늦게 했다. 비교적 다른 직업군에 비해 일찍 결혼해서 아이 낳고 정착하는 선후배에 비해.

자칭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는 가정을 이루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기에 어떤 여성상과 결혼하면 좋을지 이상형을 A4용지 앞뒤로 빼곡히 적어 놨었다.  매년 업그레이드하면서. 여자 친구가 바뀌면 업데이트하면서. 앞장은 외적인 모습, 뒷장은 내적인 모습으로. 갈색 웨이브진 긴 머리에 큰 눈, 순종적이며 나와 동틀 녘까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뭐 그런 거였다. 한 50가지 정도. 구체적으로 적어놓고 바라고 기도하면 진흙 속에 숨기워진 진주 같은 여자가 언젠가는 나타나리라 생각하며 적은 종이였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목을 건들면 못 견뎌하는 쇼트커트를 선호하는, 결론을 신속하게 요구하는 해병대 아버지 밑에서 훈육 아래 자란 참군인 같은 사람이다.




성향이 다른 아내와의 경험담을 토대로 연재합니다. 핑크빛 러브스토리보다는 인간 본연을 탐구합니다.

https://www.brunch.co.kr/brunchbook/dis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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