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

by 달을읊다

"오로라는 어떻게 생기는 거야?"


아이의 질문을 들었을 때 R은 잠시 고민했다. 태양풍이 지구와 만나면서 특정 원소가 타면서 발생하는 특수한 빛-이라는 설명은 아이가 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사실 아이가 오로라의 과학적 원리에 대한 설명을 듣기 어려울 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가 질문을 하면서 R을 바라볼 때의 눈빛으로 짐작하건대 그 애는 그저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 같았다. 태양풍에 대해서도 아마 과학에 좀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테지만, R은 그 정도의 지식은 없었다. R은 우선 되는대로 이야기를 지어 보기로 했다.


"옛날에 말이지, 오로라라는 이름을 가진 공주가 있었어."

"예쁜 공주였어?"

"그야 물론이지. 공주는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순록들이 공주를 만날 때면 공손이 앞발을 꿇고 절을 할 정도였어."


아이는 잠시 그 장면을 떠올려 보는 듯했다. R도 그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하얀 눈밭에 산책 나온 우아한 공주님과 그녀를 경배하는 순록의 무리를.


"어느 날 공주님의 아빠는 딸을 이웃나라의 왕자에게 시집보내기로 했어. 하지만 공주님은 그다지 이웃나라의 왕자님을 좋아하지 않았단다. 하지만 공주님의 아빠는 그 나라의 왕이었고,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으니 할 수 없이 결혼 준비를 하기 시작했지. 이웃나라의 왕자는 못생겼지만 사실 마음이 착한 사람이었어. 그리고 공주님을 아주 많이 좋아했단다. 하지만 공주가 자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 그는 공주가 하기 싫은 결혼을 억지로 하는 것이 마음이 아팠어."


R은 이다음에 이어질 이야기를 떠올리기 위해 오로라 공주와, 강압적인 그녀의 아버지와, 못생겼지만 착한 이웃 왕자를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상대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까. 혹은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단념할 수 있을까.


"왕자는 자신의 유모를 찾아가서 고민을 털어놓았어. 유모는 선량하면서도 현명한 사람이었거든. 유모도 자존심 세고 아름다운 오로라 공주에 대해 잘 알고 있었어. 유모는 왕자에게 이렇게 조언했지. '왕자님, 그녀와 결혼하세요. 하지만 공주는 자유로운 사람이니 그녀가 머물 수 있는 공간은 아주 커다랗게 마련해 주는 게 좋겠습니다.' 왕자는 얼마나 커다란 성을 그녀에게 줄 수 있을까 고민했어. 마침내 결혼식날이 되었단다. 오로라 공주의 왕과 왕비도, 왕자의 나라의 왕과 왕비도 아주 행복해 보였지. 하루 종일 거리의 사람들에게 술과 음식을 제공하고, 악단이 끝없이 노래를 연주했단다. 하지만 오로라 공주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어. 왕자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지. 마침내 해가 졌고 사람들은 공주와 왕자가 둘이 있게 해 주고 물러 났어. 둘이 남게 되자 공주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지. '내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된다면 여기서 뛰어내리겠어요.'"


아이는 긴장한 얼굴로 R을 보았다. R은 그런 아이의 눈을 잠시 마주 보았다. 그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네가 왕자라면 공주님에게 뭐라고 했을 거 같니?"

"음... 내가 왕자라면, 아무 말도 못 하고 속상해서 많이 울었을 것 같아."


하지만 왕자는 그렇게 여리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공주의 따뜻한 손을 잡아 보고, 그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왕자는 친절한 목소리로 공주에게 말했다.


"공주님, 저는 공주님을 무척 사랑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저를 사랑하지 않죠. 공주님이 원하시는 것처럼 저는 공주님께 손을 대지 않을 겁니다."


공주는 조금 놀라서 왕자를 바라보았다. 공주는 왕자의 얼굴이 슬퍼 보인다는 것을 깨닫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하지만, 그와 함께 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을 왕자에게 잘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말도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왕자가 이어 말하기 시작했다.


"공주님께서 이미 저희 왕국으로 오셨기 때문에, 다시 공주님의 나라로 돌아가게 된다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겠지요. 그러므로 결혼한 남편의 권리로서 저는 공주님께서 이 나라에 계시기를 권유합니다. 하지만 꼭 이 성에 있으실 필요는 없어요."


왕자는 공주를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이 말을 하면 공주는 오늘 밤에라도 성을 떠나겠지만, 왕자는 공주가 더 자유롭고 행복하길 바랬다.


"공주님께서 이 나라 안에 계시기만 하다면 어디든 마음껏 다니셔도 좋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제가 질투심이 많아서 공주님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높은 탑에 가두어 두었다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원하시는 물건이나 사람은 아무나 데려가셔도 좋아요. 당신이 원하는 곳을 마음껏 돌아보시길 바라요. 아시다시피 저의 왕국은 여름이면 해가 지지 않고, 겨울이면 해가 뜨지 않는 그 경계선까지 랍니다. 공주님께서는 안락한 휴식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이 곳으로 오세요. 저는 여기서 항상 있을 겁니다. "


공주는 어떻게 왕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을까 싶어 놀랐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눈이 진실되어 보였다. 공주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지만, 드넓은 설원을 여행할 수 있다는 기쁨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공주는 손을 뻗어 왕자의 손을 잡았다.


"왕자님, 그것은 실로 저의 오랜 꿈이었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하지만 왕자님은 곧 왕이 되실 테고, 저는 왕비가 되어야겠지요. 그러니 그때까지만 여행을 하도록 할게요. 이후에는 당신의 왕비로서 평생 당신을 존경하고 함께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혹시 제가 여행을 하는 동안 지켜야 할 것이 있을까요?"


왕자는 공주의 말이 무척 기뻤다. 그녀가 왕비가 되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은 아니다. 적어도 그가 그녀를 기다려 왔던 것에 비하면, 아주 짧은 시간일 것이다.


"그러면 공주님, 하나만 약속해 주시겠어요? 우리나라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지만 숲은 험하고 눈보라는 거칠기 짝이 없지요. 그러니 공주님께서 어딘가에 머물게 되시면, 거기에 계시는 것을 제가 알 수 있게 기별을 해주시면 좋겠네요."

"그러면 제가 잠드는 곳에서 왕자님이 계시는 곳으로 제 드레스 자락을 흔들어 보일게요. 이 곳은 너무나 새하얀 왕국이라, 제가 가지고 있는 색색의 옷들은 왕자님이 계신 이 높은 성에서 잘 보일 거예요. 그러면 따로 사람을 보내지 않아도 되고, 왕자님은 제가 어딨을지 궁금해하면서 왕국을 쭉 둘러보시게 될 테니 백성들의 안위도 살피실 수 있겠지요."


공주는 혼수를 실어온 가방에서 자신의 형형색색의 드레스를 꺼내 보이며 웃었다. 왕자도 마주 웃었다. 확실히 이 설국에서 그렇게 화려한 옷감은 쉽게 눈에 띌 것이다. 왕자는 그녀의 아이디어가 맘에 들었다. 그렇게 왕자와 공주는 둘만의 약속을 하고, 공주는 몰래 여행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 이후 우리는 끝없는 밤이 이어지는 극지의 하늘에서 오로라 공주의 아름다운 드레스 자락을 훔쳐볼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자애롭고 현명한 왕비가 되어 여행을 끝낼 때까지.


R은 이야기를 마치고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오로라 공주는 참 커다란 사람인가 봐,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다행히 이번 이야기는 아이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언젠가 둘이서 오로라를 보러 가자, R도 말했다. 아이는 끄덕이며 R의 팔을 베고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R이 아이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는 동안 아이의 숨소리는 깊고 규칙적으로 변해갔다. 아이가 언젠가 오로라 공주처럼 자유롭게 떠나는 날이 온다면- 아무리 열심히 전화를 한다고 해도 R의 마음은 쓸쓸할 것이다. 그런 날이 아직 멀었기를, 오로라 공주가 왕비가 된 이후만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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