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관 시간이 다가올 무렵이었다. 사서는 마지막으로 서가를 돌아보는 중이었다. 자고 있는 학생이 있다면 깨워 보내고, 제자리에 있지 않은 책이 있다면 도서분류대로 가져온다. 책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폐관 시간을 일깨워 주는 것도 그의 몫이다. 사서가 2층을 다 돌고 3층의 공학 - 섬유공학 서가를 둘러볼 때였다. 할머니 한 분이 서가 근처의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요즘 할머니 답지 않게 쪽진 머리를 하고, 두꺼운 돋보기를 쓰고 있었다. 할머니는 책에 몰두해 있는지 눈은 가늘게 뜨고 미간에는 깊은 골이 파여 있었다. 사서는 일부러 약간 큰 소리를 내며 다른 책상 위에 있던 책을 주워 모았다. 할머니는 돌아보지 않았다. 사서는 할머니 옆으로 가서 흠흠,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마침내 할머니가 자신을 돌아보았다. 돋보기 탓에 눈이 무척 일그러져 보였다.
"방해해서 죄송하지만 이제 폐관 시간이어서요. 혹시 책을 마저 읽고 싶으시면 대여 도와 드릴까요?"
할머니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폐관 시간..?"
사서는 속이 타기 시작했다. 그런 마음을 감추려 짐짓 쾌활하게 말했다.
"네, 저희 도서관 직원들도 책을 정리하고 퇴근해야 하니까요."
"무슨 소리요, 여기는 내 서재인데."
"네?"
"내 서재라고. 나는 여기 이 자리에서만 몇 년째 책을 읽고 있단 말이오."
"할머님, 죄송하지만 여긴 공공 도서관입니다. 제가 여기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할머님을 뵌 적이 없어 얼마나 자주 오시는지는 모르겠는데요. 저희도 운영 시간이라는 게 정해져 있는 곳이니 그만 댁으로 돌아가 주세요."
"아니, 여기가 내 집이고 내 서재라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여기 이리 앉아 보소."
사서는 뭔가 잘못 걸렸구나 싶었다. 머리가 좀 이상한 할머니 인가 싶었다. 얼른 가서 오래 근무한 다른 사서분이나 관리소장님을 불러오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할머니가 워낙 형형한 눈빛으로 째려보고 있어, 주춤주춤 의자 하나를 끌어다 앉을 수밖에 없었다.
"여긴 우리 집안에서 돈 들여 만든 내 서재요. 이옥순이가 내 이름이오. 아마 내 책들이 많다 보니까 우리 집사가 직원들을 뽑아서 관리하고 있는 모양인데, 제대로 직원 교육을 못한 모양 이외다. 나는 내 아버님께 벌을 받아서 이 서재에서 나갈 수가 없소. 여기서 따로 비밀이 감춰진 책이 있다 했는데, 그 책을 찾을 때까지는 서재에서 나오는 게 금지되었다오. 그러니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젊은이는 마저 할 일 하고 퇴근하면 되오."
사서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알기로 이 도서관은 재작년 말에 개관한 공립 도서관이었다. 부지나 비용도 시청에서 들인 것으로 알고 있다. 어째서 이 할머니가 이런 착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자신이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정말로 이 할머니는 정말로 정신이 조금 오락가락하는지도 모른다. 우선은 할머니를 모시고 직원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 가보는 게 맞겠다 싶었다.
"할머니, 제가 할머니를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진짜 할머님이 이옥순 할머님이 맞는지 알 수가 없는데요. 혹시 신분증 같은 걸 가지고 계신가요?"
할머니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니, 제 집에서 책 읽는 사람이 몸에 신분증은 왜 지니고 있는단 말이오."
"그러시면 신분증이 있는 곳으로 저랑 같이 가주시거나, 아니면 같이 내려가셔서 그 집사님을 찾아서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은데요. 혹시 원래 주인이 아닌 사람이 무단으로 들어와 계시는 거라면 내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할머니는 사서를 잠시 노려 보았으나, 이내 돋보기를 벗어 책상 위에 두었다. 침침한지 한동안 양 손으로 눈을 문지르다가 사서를 보았다. 돋보기를 벗은 할머니의 얼굴은 훨씬 더 피곤해 보였다.
"직원은 똘똘한 사람으로 잘 뽑았구먼. 내가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얼마만인지 모른다오. 그러니 나를 좀 잡아 주시오."
할머니는 책상을 짚고 간신히 일어섰다. 사서는 얼른 일어나서 할머니의 한쪽 팔을 잡았다. 할머니는 생각보다도 훨씬 키가 작았다. 사서의 몸의 반 정도나 될까 싶은, 어린아이 같은 몸이었다. 옷은 오래된 생활 한복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승복 같기도 했다. 할머니는 거의 사서의 몸에 기대다시피 하고 걸었다. 사서는 할머니가 거의 전적으로 몸을 기대고 있음에도 거의 무게가 나가지 않아서 이상했다. 사서는 할머니의 발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걸으며 궁금했던 이야기를 물었다.
"아까 아버님께 벌을 받으셔서 비밀 책을 찾고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 책인가요? 저도 사서니까 어쩌면 도움이 되어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음... 사연이 조금 긴데. 내가 저지른 잘못이 있어서, 그만 집안에 내려오던 수호신을 잃고 말았소. 우리 집안에 모시던 그 신은 몇 대를 걸쳐 복을 내려 주었지. 물론 가진 재산이 워낙 많았으니 그 많던 전답이 팔리고도 조금 남기는 했지. 하지만 우리의 실수로 잃은 신을 다시 달래고 찾아야 했소. 그래서 아버님은 덕망이 높으신 스님을 찾아 정성으로 빌어 신을 되찾을 방법을 부탁드렸지. 스님은 우리 집에 와서 보시고는, 남은 전답은 팔아도 여기 남은 책은 팔지 말라 하였소. 신이 어디 멀리 떠나신 게 아니라 이 책 중 하나에서 쉬고 계시다는 거였지. 그리고 수호신을 화나게 한 장본인이 한 권 한 권 꼼꼼히 들여다보면 문장 사이에 깃들어 계신 신이 깨어나 우리 집안을 돌봐 주실 거라는 이야기였소. 그래서 아버님께서는 커다란 서재를 짓고 책과 나를 같이 가두셨소. 나는 그 이후로 쭉 여기서 책을 읽고 있는 거라오."
"어떤 책인지는 아무런 힌트도 없으셨나요? 그러니까... 책이 두껍다던지, 신에 대한 이야기가 쓰인 책이라던지, 좀 더 찾아내기 쉬운 방법 같은 거?"
할머니는 하하하, 하고 웃다가 이내 가래섞인 기침을 했다. 기침을 하는 할머니의 숨결에 어쩐지 먼지가 배인 것 같았다. 사서는 할머니를 부축해 엘리베이터에 태우고 2층 버튼을 눌렀다.
"아버님께서 전해주신 이야기로는 그저 나만이 그 책을 알아볼 수 있다 했소. 젊은이가 도와주려는 마음은 기특하지만, 아마도 이 일은 내가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오. 얼마나 오랜 세월을 책을 읽었는지 모른다오. 하지만 말이지, 아직 그 책은 찾지 못했다오. 내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 저 책은 이미 읽은 책이었는지, 기억나지도 않소. 이제는 신을 찾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그저 책을 읽는 것 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책을 읽고 있을 뿐이라오."
"그렇게 오랜 세월 책을 읽으셨다면 아직 신은 찾지 못하셨어도 재밌는 책은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어떤 책이 제일 좋으셨나요?"
할머니는 빙그레 웃었다. 그때 2층 도착 알림음이 땡, 하고 울렸다.
"젊은이 손에 있는 바로 그 책이라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사서가 할머니를 잡고 있던 손을 내려다보니 할머니는 그 자리에 없었다. 자신의 손에는 그저 책이 한 권 들려 있을 뿐이었다. 사서는 멍하니 책의 표지를 내려 보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않은 것을 깨닫고는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뒤에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사서는 급히 직원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책의 제목이 한자로 쓰여 있었는데, 그는 그 글자를 읽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할머니 인생 최고의 책, 그 책의 제목이 너무나 궁금했다. 사서는 오늘 자신이 신을 만난게 틀림 없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