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 여행기-
지리산 둘레길을 따라 걷다 보면 지리산 구석, 이런 곳까지 사람 손길이 닿았다고 놀랄 때가 많다. 아무렴 나도 거기까지 걸어갔으니 다른 누가 왔다 가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 같긴 하지만, 산등성이에 삐죽삐죽 솟은 전신주와 골짜기 끝까지 닿는 시멘트 길들을 볼 때면 대단한 인간들이란 생각이다. 심지어 풀더미 사이에 버려진 물티슈 봉지들, 과자 껍데기, 가끔 양말 한 짝은 정말 대단한 인간들이 아닐 수 없다.
한참 산길을 걷다가 만난 화개장터는 거의 라스베이거스였다. 즐비한 네온간판들과 붐비는 인파(분명 인파였다)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몇 분 전까지 인적이 드물고 새소리만 들리던 곳에 있었는데, 순식간에 여러 사투리가 섞인 말소리가 들리고 여러 노래가 겹쳐 흘러 정신을 쏙 빼놓았다. 화개장터는 문명 그 자체였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엔
아랫마을 하동 사람, 윗마을 구례 사람 닷새마다 어우러져 장을 펼치네
구경 한 번 와 보세요 보기엔 그냥 시골 장터지만
있어야 할 건 다 있구요 없을 건 없답니다 화개장터
(-노래, 조영남, <화개장터> 중)
조영남이 노래를 부를 때의 모습은 이렇지 않았겠지만, 아무렴 노래를 만들어 부를만하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잠시 그 문명을 즐겼다. 편의점에서 콜라를 사 마시고, 어플로 미리 예약해둔 숙소에 들어가 호시기 두 마리 치킨을 시켜 먹고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한바탕 목욕을 했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TV를 보다 잠들었다. 대단한 인간들과 정말 대단한 인간(=나)이란 생각을 하며.
2020년 여름, 전국적으로 많은 비가 내렸다. 우리 동네는 호우주의보로 그쳤지만, 날마다 뉴스엔 침수 피해를 입은 지역이 보도됐다. 그중엔 화개장터도 있었다. TV 화면에 나온 화개장터엔 당연히 인파는 없었고, 콜라를 샀던 편의점과 하룻밤 묵은 숙소는 물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건물 꼭대기에 불 꺼진 네온 간판만 간간이 보였다. 아무리 인간이 대단해도 역시 자연은 못 이기는 법일까? 자연이 휩쓸고 간 문명의 다음을 보니 아무래도 노랫말처럼 있어야 할 것만 있고 없을 건 없었어야 했던 것만 같다. 정말 대단한 자연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