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 칠흑에 뜬 '창백한 무지개'

<2025년 4월 23일 새벽 · 서울 종로구 ’꽃‘>

by 부지깽이

대청마루 끝에서 와장창! 끔찍한 소리가 끝없이 터졌다.

세라믹 술병 하나가 허공을 가르며 벽에 부딪혔고, 그 아래로 산산조각난 파편이 쏟아져 내렸다.

눈부신 조명 아래, 비명 대신 숨 막히는 침묵만 깔려 있었다.

중앙 홀에는 장춘동이 우뚝 서 있었다.

검은 코트 안에서 분노가 시뻘겋게 끓어올랐고, 그 앞에는 보안책임자가 머리를 조아린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네 눈깔은 어디 달렸어?”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쾅!

장춘동의 발이 책임자의 정수리를 정확히 찍었다.

철퍼덕.

책임자의 몸이 한쪽으로 힘없이 구르며 고꾸라졌다.


“하, 사… 사장님! 저희 쪽 CCTV는 신호가 끊겨 있었습니다. 지금 복구 중이고… 해킹의 가능성도…”

찰싹!

그 변명은 뺨을 갈기는 소리에 맥없이 끊겼다.

입술에서 피가 흐를 만큼 매서운 손바닥이었다.

책임자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입을 꾹 다물었다.

뺨을 맞는 순간, 변명이 아니라 생존 본능이 입을 막은 것이다.


장춘동 주변에 있던 테이블, 유리병, 조명기구—

장춘동의 손에 잡히는 모든 물건들이 하나둘씩 허공을 가르고 벽이나 바닥에 부딪혀 깨지고 넘어졌다.

홀 전체가 마치 거대한 해일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참혹한 형국이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 으르렁거렸다.

“배주란 그년을 납치해서 빼돌려? 그걸 몰랐다고? 이런 썅—”


쾅!


이번엔 천장의 조명등이 그가 던진 술병에 맞고 산산조각나서 떨어져 내렸다.

그때, 문이 삐걱하고 열렸다.

그녀는 흰색 블라우스에 검은 조끼를 걸친 채, 한쪽 다리를 절며 느릿하게 걸어왔다. 왼쪽 뺨엔 시퍼런 멍이 퍼져 있었고, 눈가 아래는 피멍이 맺혀 마치 하루아침에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했다.

눈부신 조명 아래, 낸시는 아픈 몸을 이끌고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장춘동은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듯 멈칫했다.

거친 숨을 들이쉬며 꽉 쥐었던 주먹을 살짝 떨었다.

그리고는 이내 이성을 되찾은 얼굴로, 비상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딸깍. 직통 회선 연결음이 울렸다.

“옐로우.”

삐—

“지금 당장 튀어와! 놈들이 남긴 흔적 싹 다 뒤져.”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는 귀를 찢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이번에도 놓치면… 넌 진짜 끝이야. 바로 아웃이야!”


쾅!


그가 던진 전화기가 바닥을 맞고 튀어 올라 작은 대리석 조각들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정적이 흘렀다.

낸시는 말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일 뿐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분노도, 공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한 발자국 남았어요. 당신을 지옥 입구에 데려가는 일.’


* * *


새벽 5시 05분, 장동 탄약사령부 인근

하늘이 막 푸르스름해지기 시작한 시간.

서울을 출발한 위장 밴 한 대가 어둠과 안개 속을 가르며 탄약사령부 옆 도로를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담장 너머, 회색빛 2층 단독주택이 보였다.

탄약사령부 박경민 참모장의 관사였다.


밴은 속도를 늦추지도,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스르르— 한 조각 그림자처럼 그곳을 통과해 사라졌다.

잠시 후 양헌이 운전하는 작전차량이 ‘칠흑’ 앞에 멈춰 섰다.

이른 새벽, 산기슭 안쪽.

아직은 모든 것이 잠들어 있는 시간이었다.

건물 앞에는 군복을 입은 칠흑 소장 박원배가 서 있었다.

그는 조용히 차량으로 다가와 양헌이 어깨에 멘 인물을 확인했다.

배주란은 아직 정신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술 때문인지, 충격 때문인지―희미한 숨소리만 들렸다.

“안으로!”

박 소장은 양헌에게서 배주란을 넘겨받아 어깨에 메고, 탄과 함께 지하 감옥동으로 향했다.

그가 다가가자 철문이 하나씩 열렸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어둠을 타고 뚜벅뚜벅 지하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마침내— 둘은 퍼플이 갇혀 있는 끝방 앞에 멈춰섰다.

박 소장은 배주란을 어깨에서 조심스레 내려 탄에게 잠시 기대게 했다.


“여기에다 가둘 거야.”

그 순간, 옆방에서 한 수용자가 철창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야…! 저 여자, 탤런트 배주란 아냐? TV에 나오던 그 여자!”

“진짜네, 배주란 맞아!”

갑자기 철창들이 흔들리고 조용하던 감옥동이 요동치듯 소란스러워졌다.


박 소장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조용히 문을 열고, 배주란을 번쩍 안아 침대에 눕혔다.

“자! 가지.”

박 소장은 밖으로 나와 탄에게 말했다.

철컥― 돌아선 그들의 뒤로 육중한 쇠문이 닫혔다.


그 시각 1층 칠흑 사무실 안.

민주는 하품을 하면서 커피 머신을 켰다.

사무실을 구경하던 윤은 소파 위에 드러누우며 말했다.

“난 오늘부터 새벽배송 기사님들 존경하기로 했어.”

력은 입을 꾹 다물고 물티슈를 꺼내 땀에 젖은 손바닥을 닦았다.

“커피는 다방커피가 최곤데, 아쉽지만 이거라도…”

양헌은 종이컵에 물을 붓고 믹스커피를 타서 휘저었다.

커피머신에서 원두커피를 내리던 민주가 도끼눈을 뜨고 노려봤지만, 양헌은 헛기침을 하면서 못 본 체했다.

첫 작전을 무사히 마친 레인보우 키퍼들의 긴장이 이제야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 * *


천장은 낮았고, 벽은 거친 콘크리트였다.

조명은 있었지만 창문이 없어 암흑 같은 공간.

겨우 정신을 차린 배주란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눈 앞의 공간은 낯설면서도 어딘가 밀실같이 익숙했다.

그녀는 벽에 기대 주위를 둘러본 후, 천천히 눈을 감았다.

깊고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한숨에는 슬픔도, 원망도, 두려움도 없었다.

다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에 대한 기대가 배어 있었다.


그때였다.

찰칵.

벽 쪽에서 작은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이 방에만 존재하는, 밖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는 은밀한 문이었다.

그 문을 밀고 들어온 건— 리차드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문을 닫고, 조용히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는 한 손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컵을 들고 천천히 다가왔다.

“마담.”

그 한마디에 배주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고생했어요.”

그는 살며시 머그컵을 내밀었다.

컵에서 피어오른 김이 두 사람 사이에 말하지 못한 시간들을 녹이는 듯했다.

“여기는 안전하니 당분간 여기서 지내요. 불편하겠지만 조금만 참아요. 작전이 끝나면— 마담이 원했던 여권과 정착금을 드릴게요.”


그 말에 배주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녀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리차드를 바라봤다.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리차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그럼… 쉬어요.”


그는 들어올 때 발걸음 그대로 묵직한 의미를 남긴 채 문 너머로 사라졌다.

배주란은 커피 잔을 들고 침상에 앉았다.

손끝이 따뜻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지만, 마음 속 불안과 두려움은 서서히 녹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기억 속 어느 날을 끄집어냈다.


* * *


2009년 어느 가을 밤,

‘꽃’의 VIP 라운지에는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안쪽 깊숙한 VIP룸에는 30년산 양주가 벌써 몇 병째 비워지는 중이었다.
정계와 재계를 주름잡는 사내들이 흥청망청 술잔을 주고받았다.

그 테이블 한 쪽에 검정색 수트를 입은 중년 남자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리차드 한… 맞으시죠?”

가슴골 깊이 파인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배주란. 10년 전 은막의 여왕이 치명적인 미소를 띠고 있었다.

“사실… 사인 한 장 부탁드리고 싶었는데요.”

그녀가 살짝 웃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제가 먼저 청해야 할 것 같네요. 당신의 연기가 더 완벽하니까.”

리차드가 잔을 비우고 낮게 말했다.

“여기선 대사 없는 연극이 벌어지죠. 관객은… 다 입막음된 사람들이고.”

배주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순간, 그녀의 속마음이 살짝 터져 나왔다.

“…여기선 매일매일이 연극이에요. 끝도 없고, 무대도 없죠. 커튼콜도, 박수도 없이… 죽을 때까지.”

리차드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만두고 싶습니까?”

“그게… 가능하다고 보세요?”

“가능하게 만들어야죠. 당신에게 그럴 ‘연기력’과 용기가 있다면.”

배주란의 가슴이 요동쳤고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들 앞에 놓인 잔 속의 위스키가 살짝 찰랑거리는 순간―

리차드가 오래 준비하고, 배주란이 자신의 운명을 건 작전이 시작되었다.


[기밀문서 : 페일 레인보우 / 레벨 A / 001]

대상 : 배주란 (전직 배우, 현 레인보우 키퍼 인디고)
상태 : 이중첩보원. 장춘동 감시 및 정보전달
접선 책임자 : 리차드 한
1차 임무 : 장춘동 및 레인보우 키퍼 내부 정보 수집
2차 임무 : CIA 연락선 조셉 부국장 포섭
플랜 B : 위급상황시 칠흑 피신, 희망도시 정착 지원
주의사항 : 레인보우 헌터 전원에게 신분 비공개. 특히 엘린.

코드명 : Pale Rainbow — 진짜 무지개를 밝히는 어둠 속의 그림자.

그리고 어젯밤, 리차드는 배주란에게 암호를 보냈다.

‘해가 떠오르기 전, 커튼은 내려간다’

—그 말이 의미하는 건 단 하나. 내일 새벽, ‘작전’이 실행된다는 것이었다.

배주란은 이미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다.

한 달쯤 전부터 장춘동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가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걸 확인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사람의 눈을 읽는 법부터 익혀야 했으니까.

그건 배우로 살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변정숙. 그 여자가 바로— 장춘동의 그림자였다.

언제나 자신의 뒤를 밟고, 자신이 뱉은 말끝을 장춘동의 귀에 속삭이는 가엾은 앵무새.

배주란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장춘동에게 보고한다는 것을….

그녀는 그걸 숨기지도 않았다. 숨겨야 할 만큼 두려움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녀의 뒤에 장춘동이 있다는 걸 도리어 은근히 과시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상황이 이상하게 변했다.

그녀는 평소보다 자주 사라졌다.

외박이 잦아졌고, 그럴 때마다 그녀의 눈엔 묘한 윤기가 돌았다.

수면 아래에서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신호였다.

배주란은 자신이 어쩌면 곧 ‘정리’될 수도 있다는 직감을 받았다.

리차드에게 이 사실을 전했을 때, 그는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군요. 이제 당신을 데려가야겠습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의 말 속엔 자신이 다치기 전에 이곳에서 꺼내주겠다는 결의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배주란은 오늘 여기에 기꺼이 ‘감금’됐다.

창문도 없고, 시계도 없는 이 방에.

이건 납치가 아니라 보호였고, 그와 함께한 완벽한 작전이었다.

그리고 그 작전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이었다.

지난날 그녀의 삶을 채웠던 것들이 눈 앞에 펼쳐졌다.

가장 화려했던 무대, 가장 비참했던 밤.

가장 무서웠던 남자, 가장 믿고 싶었던 손길.

커피는 식어가고 있었지만, 그 향은 그녀의 가슴 속에 오래 남았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 무대에는 커튼콜이 있을 거야.

그리고… ‘진짜 관객’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자신을 짓밟은 악마는 저 무지개 너머로 사라질 거야.

작전명 Pale Rainbow, 즉 ‘창백한 무지개’는 그녀가 지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녀보다 먼저 사라진 퍼플이 맞은편 방에 있다는 것을.

그녀의 옆 방에 변정숙이 지금 이 순간도 오들오들 떨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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