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10월 26일 밤 · 베트남 닌호아 끼엠마을>
뚜엣 이웃집 여자의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녀의 입술은 하얗게 말랐고, 눈동자는 공포에 질려 빛을 잃었다.
아이를 안은 두 팔은 앙상했고, 이마에 총구가 닿은 아이는 울지도 못하고 엄마만 바라보고 있었다.
장춘동은 그 광경을 즐겼다.
그는 이 상황이 아주 달콤했다.
“좋아.”
그는 조용히 총을 세우고 대검을 끼웠다.
날카로운 칼날이 짧은 금속음과 함께 장착됐다.
그 칼끝이 아이의 배에 닿았고, 아이는 그제서야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앙! 엄마~”
아이의 배에 칼끝이 닿자 그녀의 눈이 뒤집혔다.
“셋을 주겠다.”
장춘동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얘기하면 살려주고… 몰라도, 이 아이는 죽는다. 그 다음은 네 차례고.”
그녀의 입에서 숨이 멎었다.
울지도, 애원하지도 못했다.
온몸이 얼어붙었다.
장춘동은 조용히, 정확히, 그리고 아주 천천히— 칼끝을 아이 배에 눌러댔다.
피가 배어 나오지 않아도, 아이의 살과 공포는 충분히 찢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아아악! 알아요! 제발~!!!”
그녀의 절규가 밤의 정적을 찢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숲 쪽을 가리켰다.
“저쪽… 숲… 숲 쪽에… 며칠 전에… 아이가 말했어요… 한국군 아저씨가… 숲에서 뭔가… 만들고 있다고 했어요…”
말이 엉켜도, 숨이 끊겨도, 그녀는 살고 싶었다.
아니— 아이만은 살리려 했다.
그런데—장춘의 입꼬리가 천천히, 잔인하게 올라갔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탕!
아이의 배에서 불꽃이 튀었다.
피가 튀었고, 아이의 작은 몸이 그녀에게로 고꾸라졌다.
“아아악— 안 돼! 제발! 안 돼…”
하지만 그녀의 비명은 이미 죽은 아이를 깨울 수 없었다.
탕!
이번엔 그녀였다.
그녀의 머리가 뒤로 젖혀지며, 핏물이 밤하늘로 튀었다.
장춘동은 총구를 툭툭 털고 말했다.
“살려준다는 건 거짓말이었어. 이제, 정말 만나러 가야겠군.”
그의 눈빛은 잔인한 쾌락으로 이글거렸다.
장춘동은 그녀가 가리킨 숲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은 흉기였다. 이제 목표는 단 하나, 뚜엣.
그녀를 찾아 아이까지 모조리 지워버리겠다는 사명감뿐이었다.
그는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고, 오직 이 목적만이 그의 호흡을 유지시켰다.
그런데— 그가 멈췄다.
“…”
무언가, 뇌리를 스쳤다.
“빠큐. 그 새끼라면… 어디 숨었지?”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숲 가장자리— 그림자 사이, 바위틈….
혹시 그 근처에 박규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광기 속에서 번뜩였다.
그때였다.
“분대장님.”
낯익은 목소리. 그러나 어딘가 딱딱하고 무거운 기색.
그는 고개를 돌렸다.
박원배 병장이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느릿하게, 그러나 분명히 장춘동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홀린 것 같기도, 깨어난 것 같기도 했다.
박 병장은 입술을 달싹이며 다가왔다.
그의 얼굴엔 뭔가 간절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퍽!
장춘동의 발이 박원배 병장의 정강이를 찼다.
“끄억—!”
박 병장이 무릎을 꿇자—
쾅!
장춘동의 개머리판이 박 병장의 철모를 후려쳤다.
박 병장의 몸이 옆으로 휘청였다.
철모는 한쪽으로 벗겨졌고, 이마에 핏줄기가 촘촘히 번졌다.
장춘동이 포효하듯 외쳤다.
“생각하지 마, 새끼야!”
“그냥 따라와. 그게 니가 할 일이야!”
그의 목소리는 명령도, 설득도 아니었다.
그것은 생각을 멈추게 하려는 폭력의 주술이었다.
“군인이 감정 쳐 넣기 시작하면 다 죽어, 알아?”
박원배는 입술을 깨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머릿속에 울리는 건 고막을 친 피의 맥박뿐.
그러나 눈동자만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그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나는… 너와는 다르다.’
장춘동은 그 시선을 더 이상 마주보지 않았다.
그는 사람을 똑바로 보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 있는 건 이제 사람이 아니라 ‘목표물’이었기 때문이다.
총구는 다시 숲을 향했고— 그의 발소리는 복수를 위해 젖은 땅 위를 짓밟기 시작했다.
그때— 박규도 그를 보고 있었다.
작은 풀숲 뒤, 땀에 젖은 몸으로 그는 눈을 부릅뜨고 다가오는 두 그림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규는 숨을 죽이며 생각했다.
‘총을… 들고 올 걸.’
그는 후회했다.
회귀 첫날, 장춘동에게 겨눈 총은 발사되지 않았다.
방아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혹시 이번에도…?’
그 불신, 그 공포, 그리고 맨몸으로 지켜야 할 생명이 규의 가슴을 찔렀다.
그 때― 장춘동이 동굴 앞에 섰다.
나뭇가지로 급히 가려놓은 입구는 그의 눈에 이미 ‘표적’으로 보였다.
그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스쳤다.
“거기 숨은 거, 다 알아.”
“어서 나와. 열 셀 때까지 나오면 살려줄게.”
동굴 안, 뚜엣은 숨을 삼켰다.
품 안에는 아기, 탄이 있었다.
나가면 죽고, 안 나가도 그는 부술 것이었다.
뚜엣의 떨림이 탄에게까지 전해졌다.
“하나… 둘…”
장춘동이 숫자를 세기 시작하자—
“야!!”
규가 뛰쳐나왔다. 풀숲을 뚫고 내달리며 외쳤다.
“그만해! 장춘동!”
규의 목소리는 천둥처럼 울렸다.
그 순간— 숲이 흔들렸고, 공기가 찢겼고, 장춘동의 눈이 돌아갔다.
규와 장춘동.
둘의 운명을 가르는 마지막 대치가 시작되었다.
“안 돼! 뚜엣… 나오지 마!”
규가 절규하며 뛰쳐나왔다. 풀잎이 찢기고, 발목에 돌멩이가 부딪혔다.
그러나— 퍽!
장춘동의 발이 규의 가슴을 찼다.
규는 허공에서 휘청이며 바위 앞에 내동댕이쳐졌다.
“큭…!”
바위에 이마를 부딪힌 규는 피를 흘리며 일어섰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장춘동은 허리춤에서 수류탄을 꺼냈다.
그리고— 거침없이 핀을 뽑았다.
“셋을 주겠다.”
그의 손에는 음침하게 낄낄거리는 죽음이 들려 있었다.
“나오면 살려주고… 안 나오면 만신창이가 될 거다.”
“안 돼애애애!”
규가 다시 일어나서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쾅!
장춘동은 달려드는 규의 얼굴을 개머리판으로 가격했다.
규의 관자놀이가 터지고, 몸은 다시 바닥으로 휘청였다.
피가 뚝뚝 흘렀고, 시야가 흔들렸다.
그리고 그때—
뚜엣이 나왔다.
동굴 안에서, 흰 담요에 탄을 감싸 안은 채.
장춘동의 눈이 그녀를 노려봤다.
“그래… 이제야 나왔네?”
그는 천천히, 총구를 뚜엣의 가슴에 겨눴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규는 비틀거리며 손을 뻗었다.
“안 돼— 제발…!”
탕!
총성이 숲을 찢었다.
뚜엣의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가슴 한가운데—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규는 절규와 함께 무너졌다.
“뚜엣…”
피투성이가 된 그녀의 몸을 안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팔에서 탄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작은 몸뚱이가 울지도 못하고 바닥에 뒹굴었다.
규는 탄을 끌어안고, 붉게 물든 품 안에서 온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로 울부짖었다.
“으아아아아아아—!!!”
그리고— 장춘동은 말없이 총구를 그에게 들이댔다.
피를 토하는 그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방아쇠에 손을 얹었다.
“이제… …끝내자!”
바람이 멎었다.
시간도 멎었다.
모든 것이 이 방아쇠 위에 걸려 있었다.
규는 눈을 질끈 감았다.
탕! 들려올 총성, 느껴질 고통.
이번 생도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몰라. 뚜엣과, 탄과… 그렇게, 같이.’
그는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퍽!
총성과 다른,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
퍽! 퍽!
규는 눈을 떴다.
그의 눈앞에— 장춘동이 쓰러져 있었다.
총은 바닥에 나뒹굴었고, 그의 머리에선 피가 줄줄 흘렀다.
그는 기절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박원배 병장이 숨을 몰아쉬고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이건 아니다’는 한 사람의 선택을 담고 있었다.
“박 병장! 어서 피해!”
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황을 이해할 틈도 없이— 본능처럼 탄을 끌어안고 몸을 돌렸다.
마을 옆 미군 부대 방향으로— 숨도 쉬지 않고 달렸다.
피 묻은 땅을 딛고, 풀을 헤치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며―
그렇게 잔인한 밤을 뚫고 달렸다.
어둠 속에서 그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10여 분쯤 달렸을까.
심장이 찢어질 듯 뛰고, 폐는 수천 개의 바늘에 찔린 것처럼 욱신거릴 무렵.
그의 눈 앞에서 갑자기—
펑! 펑—!
헤드라이트가 밤을 찢듯 켜졌다.
두 개의 강렬한 빛줄기가 어둠 속 규와 탄을 비췄다.
규는 본능적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 너머, 운전석에서 리차드가 뛰어내렸다.
“규!!!”
리차드가 다급하게 뛰어왔다.
그는 규의 모습을 보고 말을 잃었다.
규의 몸은 피범벅이었고 눈은 초점없이 흔들렸다.
산 채로 지옥을 뚫고 나온 친구.
그리고― 그의 품엔 작은 생명, 탄이 안겨 있었다.
그의 몸이 비틀거리며 리차드 앞으로 쓰러졌다.
리차드가 손을 뻗어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규는 탄을 안은 팔만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입에서 피 묻은 말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탄을… 부탁해.”
그것은 부탁이 아니었다.
피 묻은 유서였고, 한 맺힌 맹세였다.
리차드는 탄을 품에 안았다. 작고 축축하며, 아직 세상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
그제야 규는 허리가 꺾이듯 주저앉으며 눈을 감았다.
그는 혼절했다. 정신은 이미 남은 힘을 모두 쏟아낸 뒤였다.
그 순간, 쿵쿵쿵!
바위를 넘는 군화 소리.
어둠 속에서 장춘동의 분대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저기다! 분대장님 말이 맞았어! 어서 잡아!”
괴물들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밤을 울렸다.
리차드는 규를 다시 볼 시간도 없이 차에 올라탔다.
오직 탄만을 태우고—
그는 기어를 밀었다. 엔진이 울리고 차는 속도를 냈다.
뒤에서 총성이 들렸고, 무전기가 지직거렸다.
그러나 리차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품에 안은 작은 생명, 탄에게 조용히 중얼거렸다.
“넌… 꼭 살아야 해.”
차는 밤을 가르며 사라졌다.
그가 떠난 자리 뒤로는 아직도 불길, 연기, 총성….
그리고— 쓰러진 규가 남겨져 있었다.
* * *
다음날 새벽, 백마부대 내 야전 영창.
천장은 오래된 습기와 곰팡이로 누렇게 얼룩져 있었다.
텁텁한 철조망 냄새, 녹슨 자물쇠, 그리고 땀과 피의 잔향.
규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꺼풀은 천근만근이었고, 몸은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머리가 욱신거렸고, 한쪽 관자놀이엔 장춘동에게 가격당한 개머리판 자국이 선명했다.
“깨셨습니까…?”
어둠 속, 맞은편 벽에 기대앉아 있던 박원배 병장이 말했다.
규는 눈을 껌뻑이며 천천히 상황을 정리하려 애썼다.
이곳은… 영창, 나는… 살아 있구나!
“여긴… 왜?”
“명령 불복종이랍니다.”
박원배는 씁쓸하게 웃었다.
“저야 뭐… 장 하사 말 안 듣고 뒤통수 깠으니까 그렇다 치고… 병장님은 뭐, 원래부터 찍혔으니까….”
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든 대가는 이미 예상한 것이었다.
그때— 문 밖에서 쾅! 하는 발소리와 고함이 들려왔다.
“문 열어! 이 새끼들 다 쏴 죽여 버릴 거야!”
피칠갑을 한 채 눈이 까뒤집혀 있는 장춘동이었다.
“분대장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밖에 있던 분대원 둘이 그를 양쪽에서 붙잡고 있었다.
“이것들 쏴 죽여야 된다고! 빠큐 저 새끼, 뚜엣 숨겼잖아! 박 병장 저 새끼는 감히 나를!”
그는 개머리판을 틀어쥐며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편을 들지 않았다.
한 분대원이 조용히 말했다.
“분대장님, 민간인은 덮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편, 같은 중대원을 죽이는 건 '‘살인죄’입니다.”
“그리고 그걸 막지 않으면 ‘살인방조죄’가 됩니다.”
그 말에 장춘동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 뭐라는 거야… 니들이 지금 나를…!!!”
그러나 분대원들은 단호하게 덧붙였다.
“여기까지입니다. 그만 하시죠!”
장춘동은 울그락불그락하며 길길이 날뛰었다.
총을 바닥에 내리치고, 소리를 지르고, 철창을 붙잡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놈들이 먼저 날 쳤어! 난, 난!… 작전대로 움직였어!”
장춘동의 위선에 찬 자기변명은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규는 그저 눈을 감은 채,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고 있었다.
“뚜엣… 이번에도 널 구하지 못했어. 탄만… 살았어.”
* * *
불타버린 끼엠 마을은 죽음의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 속에서 희미한 숨소리가 들려 왔다.
린의 집 지하, 원래 고구마 저장용 구덩이였던 곳이었다.
며칠 전 뚜엣은 ‘혹시 린이 돌아왔을 때 숨을 곳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규는 이웃들 몰래 작은 은신처를 파 두었다.
그리고 촌장에게만 그 위치를 알려주었다.
촌장은 ‘그날’ 저녁.
규가 뚜엣에게 달려가며 외치는 소리를 듣고, 마을의 고아 남매를 그곳에 숨겼다.
열한 살 소년 도 반 남과 아홉 살 소녀 도 티 후옹은 구덩이 안에 들어가 몸을 웅크렸고 촌장은 짚더미를 덮었다.
린의 집은 장춘동이 린의 어머니를 능욕한 뒤 그녀가 목을 매 자살한 곳이었다.
그 뒤로 밤마다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소문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물론, 장춘동과 그의 분대원들도 그 집만은 피했다.
그들은 마을의 모든 집을 샅샅이 뒤져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죽였지만, 린의 집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다.
저주받은 집 속, 박규가 만든 어둡고 조그만 구덩이.
짚으로 덮인 그곳에서 남매는 악몽같은 밤을 버텼다.
이튿날, 총성이 멎고 불길이 가신 뒤 부대원들이 마을에 도착했다.
그와 동시에 리차드 한이 이끄는 미군 수색팀도 들어왔다.
리차드는 린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며칠 전 규에게 들은 장소를 찾아내 짚더미를 걷어낸 순간―
“…살아있다!”
두 아이가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리차드는 손을 내밀어 아이들을 안아 올렸다.
규가 만든 작은 구덩이 하나가 두 생명을 살린 것이다.
53년 전 전쟁터로 떨어진 규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해답이―
그가 판 구덩이에 묻혀 있었던 것이다.
「죽이지는 못해도, 살릴 수는 있다!」
영창으로 규를 찾아온 리차드가 고아남매가 살아 있었다고, 아이들을 미군과 연계된 보호시설에 맡겼다고 말해 줬고, 규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끼엠마을 학살은 전두칠의 지시 아래 베트콩 은신처 섬멸작전으로 포장됐고, 장춘동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규와 박원배 병장은 열흘 뒤 영창에서 나왔다.
그날 밤 있었던 일을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지장을 찍은 후였다.
모든 것이 무너졌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한달 뒤 리차드는 린과 함께 탄과 고아남매를 영국으로 보냈다.
규는 그들이 떠나기 전에 잠시 탄을 안아볼 수 있을 뿐이었다.
리차드와 카페 사장 부부의 도움으로 런던에 정착한 린은 세 아이를 돌보며 살았다.
리차드는 몇 년 후 린에게 청혼했고, 둘은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았다.
그 중에 한 명이 엘린이었다.
* * *
홀로 남겨진 규는 잿더미가 돼 사라진 마을에서 오열했다.
뚜엣의 웃음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두 달 뒤, 1972년 12월 31일.
규는 귀국선을 탔다.
갑판 위에 구겨 앉은 수백 명의 병사들은 살아 돌아가는 기쁨에 웃고 떠들었다.
어떤 이는 노래를 불렀고, 어떤 이는 철모를 벗어 높이 흔들었다.
그러나 규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갑판 끝에 홀로 서서, 저 멀리 베트남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엔 바다보다 깊은 회한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애끊는 그리움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렇게 ‘1972년의 베트남’은 끝내 멀어져 갔다.